조선건국세력이 두문동에 불을 지르자 두문동을 나와 고향에 은거했다. 『북부여기』외에 『화애사건』 『화동인물총기』를 지었고 』 『천부경주해』를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계연수는 이형식의 집을 방문하여 범세동이 지은 『』을 얻었다고 하였고 그가 지은 『천부경요해』에 『천리경』을 인영하고 있다. 사후 후덕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이다.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북만마을에 있고 북구 상룡동에 유허비가 있다.

 북부여기의 가치 

 범장의 『북부여기』는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BCE 239년부터 동부여가 망하는 CE22년까지 261년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단군조선의 종말, 북부여의 건국과 전개, 위만왕조의 성립과 멸망, 후기북부여와 서부여의 실상, 갈사부여, 최씨낙랑국, 한사군, 남삼한 등 현재의 사학계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난제들을 풀어주는 보배로운 서적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고리link에 해당되는 나라이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삼국의 건국이 모두 북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단편적인 내용만 기술하여 일목요연하게 부여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학자들마다 중화주의사관에 경도되어 각자의 생각으로 부여 사를 기술하여 더욱더 후학들을 미혹하게 하였고 일제 식민사관을 계승한 지금의 강단사학계의 부여 사에 대한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성립된 시기가 다르고 활동한 영역이 각기 다른 부 여를 하나의 부여하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오류이다. 『북부여기』 속에는 현 강단 사학계에서 알지 못하고 왜곡 해석하는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수많은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이를 바탕으로 열 개의 부여와 부여 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열 개의 부여  

 1) 원시부여 

 고조선을 건국한 초대단군은 부루, 부소, 부우와 막내아들 부여를 두었다. 규원사화를 보면 “부소, 부우와 막내아들 부여는 모두 당시 수도였던 하얼빈의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것이 곧 구려, 진번, 부여 등 여러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단군세기』에서 “우현왕 색불루가 좌우의 사람들과 사냥꾼 수천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에서 22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고 했는데 부여신궁은 백악산 아사달로 지금의 길림성농안 장춘 일대로 단군의 아들 부여가 봉해진 곳이다. 초대단군의 넷째아들 부여가 부여후로 봉해진 땅의 명칭이 부여가 되었고 이것이 최초의 부여이고 원시부여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의 모든 부여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2) 대부여 

 43대 물리단군 36년BCE426에 우회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해에 백민성 욕살 구물이 우회충의 목을 베고 장수의 추대를 받아 장당경에서 44단군에 등극하시고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다. 대부여라는 국호를 쓴 이유는 43세 물리단군 때가지 도읍했던 백악산 아사달의 지명이 부여였기 때문에 수도는 비록 옮겼지만, 이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대부여는 단군조선의 제3왕조가 된다. 『성경지』를 인용한 『동사강목』의 내용을 보면 “부여국은 지금 요령성 개원현 소재지 경내가 모두 그 땅이다. 그 왕성은 개원현성 서남족에 있는데 에서 통주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장당경아사달이 있었던 개월 시에 부여가 있었음이 확실해진다. 

 -계속 대한사랑자료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