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에서 현세에 이르기까지 세인의 입에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 많은 도덕적인 판단을 내려왔다. 클레오파트라는 냉철한 계산에 따라 권력을 추구한정치가로 평가받는가 하면, 우유로 목욕을 하고 진주를 녹인 포도주를 마시는 등 사치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혹자는 감수성이 풍부한 여인이라 하고, 어떤 이는 뛰어난 영웅들을 파멸로 이끈 여인이라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왕국을 정복한 아우구스투스황제를 존경했던 로마의 작가들은 클레오파트라에 관해 중요한 서술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의 눈에 클레오파트라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업적으로 꼽을 만한 것은, 그녀가 자신과 이집트에 유리한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로마의 강력한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12세는 왕조의 틀 국정에 참여하게 했다. 아버지는 사망한 후 그녀는 궁중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그녀의 동생에게 왕관을 물려주고 알렉산드리아로 부터 도망쳐야 했다.
BC 48년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도피한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외교적인 수단과 함께 그녀의 매력을 이용해 카이사르를 유혹하여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유혹에 넘어간 카이사르의 도움을 받은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왕좌에 오르게 되었고, BC47년에는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은 공식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로 명명되었다. 다른 사료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리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카이사리온’이라는 이름은 이집트와 로마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BC46년 중반에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도착하여 카이사르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이집트와 로마사이의 연립협정을 체결했고, 이 협정으로 이집트의 여왕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연합국여왕으로써 ‘ 로마의 벗’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이런 우호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이집트로 돌아가야 했다.
BC41년에 로마의 권력을 장악한 귀족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시리아에서 만난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파르티아 원정을 눈앞에 둔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전쟁을 지원해 주는 대가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BC34년 안토니우스는 오리엔트에 새로운 제국이 건설되었음을 선포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왕 중의 왕으로 격상되었다. 둘 사이는 정치적인 연대가 밑바탕이 되었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훗날 로마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이혼라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그들의 사이에 여러 자식을 낳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여러 지배자 호칭과 왕국을 선사 했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BC 32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하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함께 로마의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편으로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1년에 서부그리스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했다.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친 사람은 먼저 안토니우스가 살상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자식들이 계속해서 이집트 왕국을 다스릴수 있도록 옥타비아누스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자신의 요구가 받아 들여 지지 않자, 클레오파트라도 경국 자살하고 말았다. -고대이야기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