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난이란 1728년 戊申년 20대 경종이 多病無子로 붕(崩)하니 노론파 영조가 등극하자 소론파 부호들이 정계진출이 막혔다고 영의정 이준경의 후손 이인좌가 영조왕은 천한 무수리 자식이라고 격문을 써 붙이곤 밀풍군을 추대코져 난을 일어킨게 무신란이다. 고로 한양엔 김중기를, 평안도엔 이사성을, 안의 거창엔 정희량과 이웅좌를 내세워 난을 일으키게 하곤 이인좌 자신은 원수가 되어 충청도서 이순신장군의 손자 이봉상을 죽이고 안성에 닿았으나 오항명 도원수 휘하 관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를 당하였다. 한편 안의현에선 이웅좌 정희량군이 창고를 헐어 양곡을 청장년들께 나누어 주곤 병졸들을 모아 거창으로 쳐들어 와선 남하면 세족 신명익을 붙잡아 곤장 29대를 쳐 죽이고 거창좌수 이술원을 끌고와선 창충사 앙진루서 이웅좌 왈 “네 목은 내 손에 있으니 항복하라” 하니 좌수 왈 “吾頭可斷” 내 목은 네가 끊을 수 있으나 “吾志不可奪탈”이라 내 뜻은 네가 꺾을수 없다 하니 격노한 정희량은 백정들께 “저놈 목을 당장 쳐라”하니 앙진루 마당이 선혈로 낭자 하였고 만여 군중들은 대경실색하였단다. 그때 거창愼씨 五忠들은 혈서로 쓴 기를 들곤 이인좌 역적들이 관군에 잡혀가 죽었다는 기별을 전해주곤 氣를 꺾자 정희량 이웅좌 나숭곤 등은 고제 성초역으로 달아났다. 허나 愼씨 5충신(신덕현, 신석현, 신광세, 신극종, 신치근)과 배두필, 남태정, 김상인 등이 이들을 포박하여 잡아 오니 이술원의 子 이우방은 와신상담 원수를 갚는다고 목을 쳐선 간을 내어 씹으니 구경꾼들은 혼비백산하였단다. 그들의 두골은 소금에 절여서 서울의 광화문 창고로 보내져 도순부사의 검시 후 매장케 했다고 亂記 4월3일자는 전한다. 훗날 정조12년 무신난을 평정한 공로로 거창愼씨 五忠臣께 공조좌랑을 추증하고 고종29년엔 사액(賜額)을 내려 春秋로 제향토록 명하였다 한다. 허나 근래와선 제례객들이 매년 줄고 게다가 신참들은 제례의식에 무지해 우왕좌왕하니 祭官 신석봉씨는 기가차서 눈물을 보이더라고 신양향 총무께서 알려와 日新日新 又日新이 아니라 날로날로 제례객도 줄고 열의도 식어가니 회장으로서 난감했도다. ※사진속 무신란 사적비는 필자가 한글세대를 위해 번안하여 2009년도에 立石하였음.
<신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