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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죄인의 기생충이다. - 사르트르 -
세계는 아름다운 것으로 꽉 차 있다. 그것이 보이는 사람, 눈 뿐만 아니라 지혜로 그것이 보이는 사람은 실로 적다. - 로댕 -
배신자는 죄인의 기생충이다. - 사르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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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가는 대로)청일전쟁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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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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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고 했다. 즉 이말 은 순리順理이다. 한데 중국은 물이 거꾸로 흐르듯 순리를 거스른 지가 오래다. 다들 아는 얘기지만 중국은 문화혁명 당시 식자들을 죽이고 사서를 다 불살랐다. 그 때 대약진운동을 하면서 무식하고 무지한 지도자가 참새가 벼를 다 까먹는다, 하여 파리, 모기, 들쥐, 참새잡기 캠페인을 벌여 참새가 멸종하다시피 했다. 자연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리어 돌아가는 것이 순리인가 한다.
그로인해 천적이 사라져 참새대신 해충메뚜기 떼가 작물을 먹어치워 3년 연이어 흉년이 들어 3억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하나 통계가 비밀이라 치자, 짐작컨대 수 천 만 명은 족히 굶어 죽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코미디같이 못 말리는 나라가 중국인 그런 나라에도 중등 교육 과정에 /정치도덕/과목이 없진 않다. 그럼에도 지나치며 어깨너머로 본 어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린이 청년들의 예의범절은 게판이었다.
나름 정돈된 도시미관에 이 빠진 것처럼 군데군데 짓다만 골조만 선 대형건축물이 적지 않음을 보곤 부동산건축경기가 정상이 아님의 느낌을 받았다. 도로변 농촌지역의 흉흉한 빈집들 불 꺼진 마을 하며 무너진 공장들 14억 인구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사람 그림자 조차 볼 수가 없어 농촌실정은 거기나 여기나 같은 실정인 것 같다.
30여 년 전에 처음 가본 중국의 운전은 과속에 반은 중앙선을 넘는 불법운전이 자동차 경주 같아 겁이 났었다. 한국군군속이 포상휴가차 여행 온 버스가 사고로 낭떠러지에 굴러 아마 다 죽었을 거라는 현장을 지나치기도 하였었다. 그간 달라졌다면 속도를 지키어 과속하지 않고 텅 빈 농촌 길에서도 신호등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고속도로나 일번도로에서 휴게실을 5박6일간 보지 못했다. 노변에서 차를 세워 용변을 보지 않도록 미리미리 운행시간을 알리어 단 도리를 철저히 해 주었다. 휴게소가 없는 것은 도둑들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폐쇄 할 정도로 민도가 낮음이 중국인가 하여 서글펐다.
개관
1894〜5년의 청일전쟁은 한국중국 일본 즉, 동아시아 3국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만나는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에 일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자 세계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로 일본의 군사적 제국주의는 청일전쟁결과 진전된 것이었다.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청국과 일본의 전쟁은 전장으로 역할 했던 우리나라에 국가적 위기로 작용하였고, 재물과 인적 손실은 막대하였다. 그 결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강화와 더불어 사회의 왜곡도 가중되었다.
이시기 삼국의 접촉과 나가는 길은 각기 달랐다. 청국군은 보호속방保護屬邦과 항왜원조抗倭援朝의 입장에서 역세에 몰리자 방기와 약탈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일본은 전승의 환희에 도취한 나머지 서양에 자랑하던 문명과 규율이 지나친 과시와 함께 심지어는 청국군과 조선에 대한 가혹한 ‘참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반면 우리는 ‘남의 전쟁에 동원 협력과 저항의 측면이 동시에 병존하였지만,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오는 사람물리치지도 않는다는 휴머니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후 10년 단위의 국제전양상은 급기야 1904년의 러일 전쟁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1931년 만주침공(만주사변) 1937년 중국침공(중일전쟁). 1941〜1945년 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부분인 아시아 태평양전쟁을 연이어 도발 하였다. 중국은 아편전쟁이후 회생의 기회가 소멸 되는 모습이 표면화 되었고, 그로부터 5년 후 의화단 사건을 매개로 한 각국연합군의 북경함락으로 이어졌고, 내부의 치열한 반성과 함께 청국멸망과 민국성립의 직접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남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양반이 전쟁전체기간동안 자신의 무력감을 “말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한 걸음도 감히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는 실정” 이었다고 표현한 그대로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간 오해와 상극의 역사적 단서로 작용하였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계기적으로 조명하고, 동아시아 3국의 시각과 데이터에 근거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지속되는 한 청일전쟁연구를 진행할 시급성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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