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경제지사 백산 선생
작성일: 2005-03-07
일제 하 8도의 덕을 쌓은 부자라 하면 경주 최 부자를 꼽는다. 최부잣집에 어느 날 밤에 도둑이 들었다.
권총을 겨누고 현금 3백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렇게 큰 돈이 없다고 하자, 약속어음을 쓰게 했다. 최씨는 어리석은 강도라고 여겼다. 액수를 미리 정한 것과 약속어음을 쓰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고난 후 경찰에 알리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써 받고 난 별난 강도가 복면을 벗으며 “이 사람아 날세…”하는 것이었다. 절친한 사이로 한때는 동업자였던 백산 안희제가 아닌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코자 백산이 변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익히 알고있었고 몇 차례 기 히 성금을 해온 터였다. 거금을 요구하기엔 염치가 없고 거절당할까봐 이런 수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백산의 고백이었다.
이렇게 헌금한 금액 중에 반이라도 임시정부에 들어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친구인 백산을 내심 의심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와 김구선생이 환국 하여 거금을 도와준 최부자를 경교장에 불러서 감사의 뜻을 표한바 있다.
김구선생이 제시한 자신의 헌금액수를 알게된 최부자는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헌금 액에서 단돈 일전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부자는 남쪽창가에서 백산의 고향인 의령 산소 쪽을 향하여 의심했던 마음을 속죄하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의령의 갑부였던 백산 이 세운 백산 상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회사인 동시에 임시정부의 거점이자 자금줄이었다.
그 자리에 기념관을 세운 것을 지상보도로 알고는 있었으나 지척인 부산을 가보지 못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다.
백산은 간도 (현: 요녕성, 길림성, 흑룔강성)의 목단강 연안에 수백 만평의 발해 농장을 세워 우리동포들의 생활 기반과 임시정부의 재정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 經濟志士(경제지사)인 것이다. 신출귀몰한 선생도 1942년 왜경에 체포 구금되어 9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초죽음 상태에서 친지들에게 인도되자, 그 날 밤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백산이 중외일보 사장시 기자의 선친은 약관 나이에 편집감독겸 취체역 상무에 재직하여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남부자였던 선생이 남긴 유산은 이가 득실거리는 수의 한 벌이 전부였다.
三一節(삼일절) 86주년, 광복60주년을 기해 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긴 애국지사가 망각 속으로 사그라져야 했는지! 지금도 을사오적의 후손들은 땅 찾기에 혈안광분하고 있고, 일부 정치가, 법조계 또한 그들에게 동조하는 것 같은 이때, 오점 투 성이 인 현대사가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