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소리)아버지와 박태기나무

작성일: 2019-04-25

해마다 지금같이 박태기 꽃이 필 때면 33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생각을 한다. 나의 아버지는 6.25가 발발(勃發)했던 1950년 내가 2살 때 군대에 입대하여 20년 가까이를 군에서 생활하신 군인 출신 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 모두의 생각은 항상 엄격했고 나무토막처럼 재미도 자상함도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항상 어렵고 무서웠다. 그런데 38여 년 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창원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2,3년 후 집값의 2/3를 빚을 내서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게 되어 집 자랑을 하기 위해 부모님을 새로 산 집으로 모시게 되었다. 2/3나 되는 빚을 얻어 집을 샀지만 그 내용을 모르셨던 부모님은 대견하게 느꼈던지 한 걸음에 달려 오셨고, 아버지는 신문지 한 장 손에 들고 다니는 분이 아닌데 박태기나무 한 그루를 들고 오셨다. 정원에 심으라면서.
아들이 새로 산 집에 박태기나무를 심어줄 요량으로 거창에서 버스의 여러 번 갈아타는 번거로움과 들고 다니기 귀찮고 불편함도 감수하고 들고 오신 그 박태기나무, 참으로 어리둥절 믿기지 않은 사실 이었다. 신문지 한 장 들고 다니지 않고, 정(情)이 없어 나무토막 같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그 먼 곳에서 여러 번 갈아타는 버스를 타고 꽃나무를 들고 오시다니,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다. 겉은 나무토막인지 몰라도 마음속에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부모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후 10여년을 그 집에서 살다가 집을 팔고 이사를 나오면서 그 박태기나무가 잘 살기를 바라며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항상 그 박태기나무가 궁금했었다. 그 후 창원생활을 마감하고 4년 전 다시 거창 고향으로 돌아와 새집에 안착하면서 제일 먼저 심은 나무가 박태기 나무였다. 아버지가 주신 나무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던 미안함과 그때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보게 해준 고마운 나무였기에.
그 이전,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하는 버스에 올라와 껌 한통 불쑥 내밀며 “가다 씹어라” 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신선물 ‘껌’에 대한 속마음도, 어려운 형편이기에 말도 안 되는 일본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살고 있는 집을 선뜻 팔아 유학비를 대어주시던 속마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보인다는 사실을 모른 체 보이는 것만 보고 산다. 그래서 나는 이른 봄 박태기가 꽃을 피우면 아버지의 속마음을 보여준 그 꽃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번 장날엔 박태기나무를 사다가 아버지 산소 옆에 심어야겠다. 어버이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