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망국의 한을 가야금으로

작성일: 2005-05-30

우륵은 가소가야(거창 가조)사람으로 조국을 버리고 신라에 귀화했다고 전하나 그것은 신라의 입장해석일 뿐, 우륵은 결코 조국을 버린 적이 없다. 우연히 만난 진흥왕의 청에 따라 신라 청년들에게 가야금과 자신의 음악을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더구나 가야금은 대가야보다 먼저 망한 가소가야(加召加耶)의 가실왕이 중국에서 들여온 ‘쟁이’라는 악기를 본 따 만든 악기이다.
후세 사가들의 기록에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은 신라에 귀화 하 지도 않았고 예술가로서의 생애 또한 화려하지도 않았다. 가실왕의 명에 의해 가야금제작에 공이 켰던 우륵은 직접 연주하여 수많은 곡을 지었는데 날로 기울어 가는 국운을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나 그 음률이 하나같이 슬프고 애잔했다.
우륵이 고향을 떠나 국원(충주)이란 마을에 살고 있을 때 가야금을 연주하고 곡을 만드는데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을 때였다. 신라의 진흥왕이 지방순시를 하다가 국원과 가까운 남성이라는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남성의 수령은 진흥왕을 즐겁게 할 요량으로 우륵에게 가야금 연주를 하게 했다. 우륵의 연주에 왕은 깊은 감동을 받아 신라 청년 셋을 뽑아 우륵에게 보내 배우게 했다.
청년들을 맞이한 우륵은 가야금을 앞에 놓고 “우선 가야금의 머리 쪽은 둥글게 만들어 졌으니 이는 하늘을 뜻하는 것이요, 밑 부분은 평평하니 이는 땅을 이르는 것이다.”
신라 청년들은 우륵의 말에 귀를 기우 리며 가야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줄을 고정하는 기둥의 높이가 세 줄인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여야 그 소리가 완벽하다는 뜻이니,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가 이 가야금 속에 담겨 있느니라” 했다.
신라 청년들은 일어나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늘 명심하여 열심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륵의 제자가 된 신라 청년들은 만덕과 법지, 계고로서 만덕은 춤을 배웠고, 법지는 성악, 계고는 기악을 배웠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음악을 논하다가 스승의 곡들이 너무 처량하고 애절하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스승의 곡 열두 곡 중 다섯 곡조를 편곡하여 우륵 앞에서 연주했다. 우륵은 깊은 회한과 절망을 느꼈다. ‘너희들의 조국 신라는 바야흐로 새 기운이 솟는 나라이니 곡조가 신명나고 흥겨울 테지만 내 조국 가소가야는 그 운명이 지는 해와도 같으니 당연히 곡조가 슬프고 비통할 수밖에…’.
제자들의 연주가 끝나자, “ 참으로 흥에 겹고 힘찬 곡조라 듣기에 좋구나”라며 우륵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향 소새 마을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과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익어 가는 들판, 비계산, 두무산, 의상산, 가야산의 봄이면 분홍빛으로 물들던 진달래 철죽, 여름이면 멱감던 벌거숭이 아이들…. 우륵은 가소가야의 아름다운 사계를 떠올리며 가야금 열두 곡조를 완성했다. 그 곡이 비록 애잔하고 슬픈 곡조일망정 고국을 생각하는 우륵의 충정 어린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에 우륵의 분신과도 같은 망향의 한이 서린 가야금 곡, 거열곡( 居烈曲)을 지었으리라. ♧
r20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