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학사루와 평장

작성일: 2009-06-15

평장이란 평토장의 준말인데, 묘지의 봉분을 만들지 않고 편평하게 매장하는 장사예식을 평장이라 한다.
좁은 국토에 1년에 묘지로 들어가는 땅이 여의도 넓이의 수 십 배도 넘고, 이렇게 가면 얼마 안가서 전국토가 묘지화 된다고 식자는 우려하고 있다. 그런 탓인가 시대의 흐름인지변화인지 매장문화 또한 바뀌어 생장에서 화장을, 공동묘지에서가족묘지로, 납골묘는 소 문중, 대 문중 또는 종교사회단체와 시군납골당 등으로 발전했고, 요즘은 아예 골분을 바다나 산야에 뿌리거나, 수목장(나무 밑에 묻는)이나 평장을 하는 지극히 바람직한 추세이다.
점필재 김종직 문하생 들은 함양 학사루에 유자광이 건 현판을 보고 자광이 어떤 놈 인데 감히 여기에 현판을 걸었느냐 고 하고는 하졸을 시켜 현판을 부수어 버렸다. 점필재김종직은 노산(단종)을 위해 조의제문을 지었고, 문인 탁영김일손(1464-1498)이 주를 달았다.
“자광은 이를 폭로하여 점필재 문인을 죽였고 점필재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신을 베었다. <부관참시> 선비들은 유자광의 처사를 통분했다.
뜻밖에 돌아가신 전 노무현대통령께서도 “화장해서 작은 비석하나만 세워 달라는 ‘평장’을 유언하셨다.” 영원한 서민대통령이신 고 노무현대통령의 소박한 정신이 길이 우리나라매장문화에 전파되어 크게 기여하고도 남음이 있어 평장에 대해 적어봤다.
고사에 유자광은 사후에 자신도 이 같은 일을 당할 것을 예측하고 자신의 모습을 닮은 자를 구하여 노비로 삼고 관대하게 대접을 했다. 노비가 죽자 말했다. 이자는 우리 집에 살면서 공로가 많아 후하게 장사 지내야 한다. 자광은 비단채색을 죽은 노비에게 입히고 장례를 한 뒤 무덤에 석물을 구비해 주었다. 유자광이 죽을 때 처자에게 유언했다. 평장을 하고 봉분을 만들지 말고 석물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내 무덤을 묻거든 노비 아무개 무덤을 가르쳐주어라. 그가 죽자 가족은 말대로 했다. 그 후 조정에서 자광이 사림에게 화를 입히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 죄를 물었다. 의금부에서 유족이 가르쳐준 노비 무덤을 파헤치고 부관참사 했기에 교활한 유자광의 무덤은 아무런 우환이 없었다. <어우야담>
비유하여 고 노무현대통령의 유지대로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과 평장”은 서민대통령의 격에 어울릴 뿐 아니라 국민에게 시사하는 바크다. 반면에 유자광의 평장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보복에 대비한 소인배의 소치라 아이러니하다. 덕수궁 대한문 앞 노대통령 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장례 후에도 조상객이 끊임없이 이어짐에 놀란 경찰이 분향소를 헐어버렸다. 시민상주측은 옆에 다시 지어 49제까지 이어간다고 했다. 경찰의 차벽에 대해 “경찰버스가 분향소를 막아주니 오히려 아늑하다.”라고 망발을 한 자의 몰지각한 삿된 행위에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촛불에 디인 경찰은 위문 온 문상객이 촛불시위로 돌아 설까봐 우려하지만, 그래도 문조객을 쫓아내서는 동방예의지국의 체모가 아니다. 유모차 촛불시위대를 아동학대법으로 다스리는 그와 같은 코미디를 다시 연출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