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詩 땜쟁이
작성일: 2009-08-03
조선시대의 유교의 폐해는 컸다. 특히 소실에서 태어난 자식을 서얼출신의 유명지식인이 가난에 고통 받는 일이 허다했고, 유득공의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그래서 영조49년에 생원시에 서얼통을 실시해 응시 기회를 얻어 급제했다. 그러나 후속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서얼출신은 문관 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덕무가 붓을 던지며 크게 탄식하기를 서울에는 물건을 고치는 수선공이 있어서 깨진 쟁반과 깨진 솥뚜껑, 찢어진 생가죽신과 찢어진 망건을 말끔히 고쳐 생계를 꾸린다. 나나 그대나 나이가 들면 글 솜씨도 거칠어 질것이니, 어찌 앉아서 굶어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붓 한 자루와 먹 하나를 가지고 필운대와 삼청동사이를 오가며 잘못된 시 〔破詩〕를 고치라고 외치면 어찌 술과 안주를 얻을 수 없겠는가.”라고 말해 서로 크게 웃었다.
〔시 땜 쟁이 補破詩匠〕해학은 해학이되 슬픈 해학이 나닐 수 없다. 더구나 이덕무와 유득공은 이미 조선 전체는 물론 중국까지 이름이 알려진 지식 인 이었다.
유득공이 29세 때인 영조 52년 유득공의 숙부 유련이 徐浩修서호수의 幕官막관으로 북경에 가면서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의 시, 399수를 추려서 《韓客巾엄集한객건엄집》으로 엮은 다음 북경에서 《皇華集황하집》의 저자 李調元이조원과 潘庭筠반정균의 시평을 받았다. 이일로 유득공의 이름은 북경까지 알려졌으나 조선은 서얼출신인 그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서얼과 노비, 북쪽사람들 등 소외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재위1년 서얼허통절목을 만들어 서얼도 관직에 진출 할 수 있게 법제화 했다. 하지만 정조가 부르기 전 그의 생계는 어려웠다.
정조2년에 鍾崗종강의 쓰러져가는 낡은 세칸 집에 살았는데, 붓, 벼루와 칼, 자 들이 뒤섞여 고통스러웠다. 비록끼니는 자주 걸러도 기색은 태연자약했다.
정조3년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인생이 꽃피게 된다. 이덕무, 박제가, 서리수 등 다른 서얼 학자들과 함께 발탁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규장각四檢西사검서라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게 된다.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 명동저동일대로 이사하는데 정조3년 성주의 은혜로 7년 동안 일곱 번 관직이 바뀌었는데, 녹봉은 입고 먹기에 족하고 집은 붓과 벼루를 늘어놓기에 족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지방관직등을 겸임하게 해 주었다. 그는 금정찰방을 비롯해 정조 10년부터 포천현감, 양근군수, 가평군수, 풍천부사를 두루 겸임했는데 지방관으로 내려가서는 양반 사대부들과 많은 갈등을 빚는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良役양역을 피해 양반 사대부집으로 들어갔다. 양반사대부는 세금 한 푼 안냈다. 이를 隱丁은정이라 했는데 유득공은 이를 찾아내 名簿명부에 등재 했다. 이는 양반사대부의 노비에서 일면 백성으로 전환시킨 일대 혁명적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포천현감시절에도 이들을 찾아내 국가의 良丁양정으로 되돌리자 양반사대부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무릇 백성들이 곡식을 받아 나가는데 身役신역의 유무를 묻고 문서를 살핀 뒤에 있으면 패를 주고 없으면 꾸짖고 그 잘못을 쓰게 했다. 그래서 100여명을 되찾았다. … 읍민들은 귀신이라 여겼고 사대부들은 원한을 품었다. 지금 정규직 비정규직을 놓고 논란이다.
아마 비정규직은 가방끈이 짧아 그만 두면 끼니를 걱정하던 예전 시 땜 쟁이 보다도 못할 수도 있을 법하다. 《古芸堂筆記고운당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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