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반대할 때는 용감하게

작성일: 2009-12-23

삶을 꾸려가면서 우리는 숱하게 찬성과 반대의 뜻을 표시해야할 때가 있다. 이럴 때 보통 “yes or no” 예스 아니면 노우로 말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사를 용감하게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용맹한 자이고, 자기를 이기고, 타인으로부터 유혹에 이길 수 있는 자다. 예수는 무저항의 덕을 설했지만, “노우”라고 말할 때는 항상 감연히 “노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악마의 유혹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용감하게 “노우”라고 했고, 또 예루살렘의 경내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파는 상인에 대해 “노우”라고 했다. 우리들은 의로운 일, 좋은 일, 바람직한 일, 아름다운일,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 사랑할일에 대해서만 “예스”라고 해야 한다.
긍정과 부정 즉, 예스와 노우가 불분명한 사람일수록 신뢰감을 잃게 된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엉거주춤하는 우유부단함 을 어지자지(암수생식기를 다가진 사람)같은 놈이라고 빗대어 놀리기도 한다. 자기의 판단과 결심이 확고하지 않다면 자기의 인생행로가 불분명하게 되고, 인간의 소중한 자주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천지만물과 화목 하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자기의 명확한 판단과 결의를 不明瞭(불명료)하게 해서 타와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밑이 가까이 닦아오고 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정부와 종교단체 등 에서돌보지만 한시적이고, 무섭게 추운 한파를 어떻게 이겨낼까 걱정된다. 그러나 곤란이 왔을 때에는 곤란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온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곤란해지고, 고생은 한층 심한 고생이 된다. 곤란이 와서 인간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영혼을 연마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실망이나 낙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잠자고 있는 능력을 깨어나게 하고, 활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오는 것이다. 그 곤란에서 도망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곤란함을 처리하는 궁리를 쌓는 것에 의해 당신의 “내재의 힘”은 눈 뜨게 되고 영혼이 한층 더 훈련되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면서 사진예술창작활동을 하시는 은사님으로부터 좋은 작품이 전송되었다. 그 중두 번에 걸쳐 ‘친북좌파를 북송’해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내용인즉 전교조, 공무원노조, 진보연합단체, 민주노총 등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50여명의 명단과 사진이 든 쪽지였다.
나는 은혜로운 선생님께 분명히 “노우”로서 동의할 수 없음의 변을 대강 이렇게 썼다. 선생님! 저는 정치를 잘 몰라서 그 일에 간예 하고 싶지도 않고, 또 거기에 밝은 정치가들이 어련히 잘 하겠습니까? 아무튼 사회에 널리 이름난 사람인 그들을 막무가내 적색분자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는 사견입니다. 더구나 세상을 한쪽으로만 치우쳐 살 수 없듯(모로 걷는 게가 바르게 걷는 것을 흉보듯) 구정물에 맑은 물을 섞어 정화하면서 사는 것이 사회생활일진대, 북한이야 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체제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들을 북으로 쫓아서 어찌하겠다는 것입니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보듬고 살기를 희망한다는 전언을 거듭 한바있다.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보는 요지경 속 같은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도 있다. 길흉화복이란 돌고 돌아 음지가 양지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비유인생사를 塞翁之馬(새옹지마)라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