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불가사의

작성일: 2010-03-03

不可思議는 사람의 생각으로 미루어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이상야릇함을 이르는 말인데, 우리 동리 동쪽 산마루에 고성이 있어 성재라 하고 그 산 골짜기를 성골이라 한다. 성골은 숲이 우거져 그늘지고 샘이 있어 눅눅한 편으로 나무꾼과소먹이는 아이들의 쉼터였다.
한마디로 멀리서 보기에 옴팡하고 음습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밀가루 공사로 늪지를 팠는데, 이 못은 세월이 흐른 지금 전답에 하등 제 구실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이 못을 판 이후 동리에 남녀 간에 해괴한 불륜이 잦아 불가피하게 동리를 뜬 사람이 여럿이고 알면서도 말을 아껴 쉬쉬하며 넘어간 지가 수 십 년이 됐다. 그 당시 한학에 통달한 집안 아저씨가 불상사를 예측 못을 파면 안 된다고 경고를 했음에도, 훗날 약이 될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아저씨는 길지를 찾아 전라도 고부로 집안이 몽땅 이주한 예도 있다.
그래서 우선 이 못에 물을 빼서 바짝 말린 후, 여건이 되면 희망근로사업 같은 관의 지원을 받아 원상복구 해야 함을 감히 제안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같은 면 삼태동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지금은 무속인 한집만이 산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이동 네 처녀들이 다 바람이 나서 외지로 나갔다는데, 내가 예전 이 진사 댁에서 여러 날 묵어 봤는데 그 집에 가면 왠지 마음이 설레(심마니의 은어로 바람) 이고, 얼른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술로 달랜 적이 많았다. 짐작컨대 지세가 높고 앞이 시원스럽게 터진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고, 멀리 문필봉이 아득히 보인다. 또 경북 어느 지방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꼭대기가 여성의 음부 모양새로 푹 파였는데, 예전에 머슴들이 쉬면서 그 웅덩이에 지개작대기를 꽃 고 휘졌고, 아이들이 작란으로 막대기를 꽃아 돌리면 동리처녀들이 바람이 나서 나간다는 말할 수 없이 괴상하고 망측한 일도 있다.
거창읍 죽전을 편의상 미륵불상과 향교에서 거창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자락까지로 볼 때 영호 강을 남으로 내려다보며 마치 대밭이 병풍처럼 띄엄띄엄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중고등학교가 무려 8개교가 좌로 나란히 있다. 이들 학교는 경쟁이나 하듯 상급학교 진학률이 좋아 ‘거창하면 교육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고, 이로 인한 상주인구 십만의 목표달성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 죽전의 향교 앞 안산에는 일제가 신사를 세웠고, 그 후 복판에 법원 검찰정이 들어서면서 경관을 조져 놨다. 그 자리에는 무성한 대밭시민공원이 조성되었거나, 아니면 대학이 들어섰어야 교육도시에 걸 맞는 그림 같아 개운치 않은 터였지만, 서서히 향교 연지 복원의 열기가 번지고 있어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긴다.
이도(井戶)자기를 굽는 사기막골은 샘터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듯이, 물이 없이는 도자를 구울 수 가 없기 때문에, 이도라는 말은 도자기골, 새미골, 음지골, 즉 보지골인 셈이다. 그래서 음습한 도자기골이나 기와골 옹기골 터는 상민들이나 사는 곳으로 쳤던 것이다.
1943년 팔자가 태어나던 해에 일제는 백두산 천지에 일본 무속인 들이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고 일본조상신 오미가미(天照大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진을 시사주간지 주간조선이 발간기념으로 일제의 야만성과 잔혹상을 고발하는 장면 등을 찍은 각종사진 30여점을 발췌 했는데, 컷은 그중의 하나임을 밝힌다.
옛 말 에 교활한 자에게는 글을 읽히게 해서는 안 된다했고, 지혜를 넓혀주면 반드시 도적이 된다하여, 날뛰는 자에게는 무술을 배우게 해서는 안 된다했고, 포학을 길러주면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일본에 문화를 전수하여 미개함을 깨우쳐 주었더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우리나라를 강압으로 침략한 일본의 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가당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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