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금성화랑무공훈장

작성일: 2010-03-09

거창군 북상면 출신 육군사관하교 7기생 임이종 중령은 국군 6사단 19연대 대대장으로 6.25 사변 1.4후퇴 격전장에서 중공군에 포위 대대가 전멸, 나라위해 산화한 불운한 지위관이기도 합니다. 금월 3월2일 창원광역시 『39사단에서 고 임이종 중령생전 금성화랑무공훈장 대위 1950년 12월 30일·금성화랑무공훈장 소령 1954년 10월 25일 서훈당시 미 수령한 훈장을 수령했습니다.
필자의 종형은 1950년 6월24일 결혼하여 익일 결혼초야에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귀대하여 대대장으로 재직 중 화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부하를 한 구 덩이에 다 죽인’ 국가에 누를 끼친 형의훈장’을 무슨 염치로 수령하겠습니까? 받아야 할지말지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고 임이종 중령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살아생전 나라에서 ‘시호 효간공과 생 정려를 하사받은 이조판서 갈천 임 훈’의 13대 손으로서, 증조부 오당 임정희는 거창월성의병 부총관 겸 경리 감으로 일경의 총격에 순국하셨고, 조부 회당 임필희는 경리참모로, 부친 유당 임유동은 3.1만세운동당시 서울중동중학생으로 만세 운동을 주도 중국에 망명, 북경대학 재학 중 하기 방학에 입국 조선학생 총 연합회를 결성집행위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조선학생 총연합회는 임 군을 가입임무를 뛰고 중국에 파견” 그 후 선친은 금의환향하여 중외일보 취체역상무 겸 편집감독으로 우리나라 최초 조 석간 8면을 발행 언론으로 국민을 일깨우는 구국선봉에 섰던 애국지사이시며, 나라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임문의3대에 걸친 독립운동과 형의 무공의 업적이 빛을 보지 못하고 멸문지경의 집안의 후손으로 참담한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선친은 《신간회, 북경한인청년회, 민주주의독립전선 상무위원, 순국의열사봉건회 사적방사위원(현 국사편찬위원과 유사), 대한민국유지로 임시정부 및 UN군 환영준비위원》 등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바지 한바, 6.25동란 때 향리에서 파르티잔의 총격을 받아 운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일제와 6.25 동란까지 제위로 여섯 어른이 나라위해 목숨을 바쳤고, 저마져 죽었으면 멸문 이 될 번했던, 뼈아픈 상처를 딛고 살아온 터입니다. 제 이름이 가진 뜻을 풀이하자면, 현 중국 땅의 70%정도가 옛 우리의 영토였음을 너무나 잘 아는 저의 선친은 우리 선대가 잃어버린 땅, 그 고토를 회복하라는 定言的 命令(정언적명령)의 이름 즉, 수풀 林, 붙들 扶, 륙지 陸자로 학 열을 무시한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남몰래 숨어서 독립운동을 한 선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족의 핍박으로 유년시절 토박이부자로 제게 유산이 많은지도 몰랐고, 저의가족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면서금전적 피해를 준 이들의 시달림에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춥고 배고픔을 이를 악물고 견디어, 죽지 않고 살아남아 바르게 성장 선대의 유훈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규대학과 대학원과정을 수료 ROTC 5기초급장교로 임관 서부전선 최전방 비무장지대 남측 경계초소장으로 국토방위임무에 전념 했습니다.
제자식도 군사(하사관 이하)로 군무를 필 했습니다. 형의 무공훈장 증 수령에 즈음하여 하고 싶은 말은 『대통령을 비 롯 정부요인은 거의가 군 미 필자들입니다. 이유 불문 국민의 기본 임무인 국토방위임무를 저버린 이들이 어떻게 군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촌부의 눈에도 ‘군 미필고위층이 더듬대는 짓’이 보입니다. ‘병약자는 행정병으로 또는 대체군무’를 하고, 아니면 정당한 사유로 면제 받는 부끄럽지 않은 제도적 사회가 정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