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성씨의 뿌리의식
작성일: 2010-04-28
우리나라 한민족만큼 성씨나 공동체를 이룬 민족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그 옛날 성씨는 귀하고 천한 신분을 나타내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씨보에 애착하는 세계유일의 족보문화를 가졌다고 한다.
어저께 민원서류를 떼러 면사무소에 갔더니 면장이 내가 쓴 글에 유교적 냄새가 난다고 지적해 주어, 읽고 평까지 해주는 면장에게 감사한다. 오늘이 마침 은진임씨 중시조인 석천 별묘 제를 모시는 날이라 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고루한 글을 써야겠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성시가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고조선시대 부터일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대 씨족사회의 지배층이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정치적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다분히 했을 것 같다.
왕족이나 귀족을 중심으로 사용되던 성씨는 공신이나 귀화인들에게 賜姓사성했는 것이 가야인 김유신에게 신라왕이 사성했듯이 퍼져나가 조선 말기에서야 상민이나 노비도 성씨를 갖게 되었다.
나의 성 은진 임씨 족보 서문에 선대가 난리 통에 상계를 잃었으니까 그 뿌리를 밝히어 바른 가통을 이어줄 것을 후손에게 당부하였다. 그래서 새 집행부는 연원을 찾아 임씨 중앙회에 의뢰해 놓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요즘은 어머니 성씨 함께 쓰기 운동이 여성부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원시모계에서 벗어나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부계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그것이가부장제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상계도 놓친 은진임씨가 어찌 양반이냐, 선대에 벼슬아치가 없는가하면, 이렇다 들어낼 것이 별로 없는터다. 그런데 ‘중시조인 갈천 선생이 효행으로 나라에서 효간공 시호와 살아생전에 『생 정려 각』을 하사받기는 조선팔도에 유일무이한 경사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오리지널국반’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 부친 석천선생을 모시는 제전에서 우리는 성씨를 통해 가통을 이어 선조의 얼과 체취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고 조상숭배와 혈연중심의 애족사상을 은연중 키워왔음을 의식하게 된다.
지금 다문화 가정이라해서 동남아에서 시집온 여인들의 수가 엄청나고 따라서 귀화 외국인 또한 수가 엄청나 그들이 새로 만든 성씨가 토착성씨의 두 배 가량 된다면 믿을까?
그래서 우리 동리가 생긴 이후 타성이 리 장을 하기는 처음이라, 이변이 일어낫다고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씨족의 대성구조가 확고했다는 일면을 보여준다.
비유해서아내가 교만방자해지는 것은 모두 장부가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갖지 못하는 데 연유한다. 『韓詩外傳(한시외전)』에 이런 말이 있다.
“맹자의 아내가 어느 날 혼자 있으면서 다리를 죽 뻗고 앉아있었다. 맹자는 그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아내가 무례하니 버리겠습니다.’고 아뢰자,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그것은 네가 무례한 것이지 아내가 무례한 것이 아니다.
『예기』에 문에 들어서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인기척을 하고, 방에 들어가려 할 때에는 시선을 반드시 아래로 내리라’하지 아니하였느냐? 이것은 남이 몸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을 때 갑자기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너는 아내의 私處(사처)로 가서 방문에 들어갈 때 인기척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네가 무례한 것이지, 아내가 무례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맹자는 자신을 책망하고 아내를 버리지 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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