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마 학 동

작성일: 2010-05-06

북상면 산수리 자연부락 삼태동에서 마학곡(계곡)옆길을 약2㎞정도 거슬러들면 막다른 곳에 삼수암 절터가 있고, 거기서 우측으로 산길을 돌아서 20분정도 올라간 석곡서당 터 비문에는 서당을 350년 전에 이곳에서 갈계리 갈천 서당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400년도 넘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마학동 서당 터는 높고 그 아래에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는 집터의 흔적이 있다. 서당에서는 멀리 시야가 훤히 내려다보이건만, 아래서는 꼭꼭 숨은 그 동리를 찾기가 힘든 위치였다.
마학의 유래는 당나라 때 시인 이백(李太白) 이 어릴 적에 공부하기 싫어 몰래 서당을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중에 쇠절구 대를 숫돌에 갈고 있는 노파를 만났다. “잘 갈리지도 않는 쇠절구공이를 왜 힘들여 갈고 있느냐”고 이백이 물은즉 “쇠절구 대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중이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이백은 발길을 돌렸고 공부를계속해 당대의 석학이 되었다. <당서 磨鐵杵마철저 편>무슨 일이나 성공을 거두려면 쇠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만큼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학동·마학골·마골로 불러지고 있는데 선대가 당서에서 따온 지명인 것 같다. 한편 갈천3형제는 이 서당에서 부친 石谷선생에게 글을 배워 학문을 갈고 닦았다고 해서 마골로 명명했나싶기도 하다.
마골은 자급자족해야 먹고 살 수 있고 또 그 일을 통해서 실천적 지식을 습득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것을 왕양명은 事上鍊磨(사상연마)라고 정의했다. 글자그대로 일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갈고 닦아야한다는 말이 된다.
어린 우리후손들이 갈천 할아버지는 역사책에도 안 나오는데 어째서 그렇게 훌륭 하신가를 묻는 일이 빈번하다. 이에 갈천은 사림(산림에 묻혀 유학연구에 힘씀)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아도 당시대에는 군사부일체라 하여 학덕 있는 숭유 도덕군자로서 명종 조 지방六賢(육현)에들어 임금이 불러 독대한 훌륭한 선생 이셨다.
유학자 남명조식선생과는 학문을 교류했으며, 내암정인홍은 갈천의 문인이시다. 그 시절에는 좌 안동 우 안음이라고 안음지에 있다.
안동은 퇴계선생, 안음은 갈천선생을 두고 이른 말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 달리하는 해석도 있다. 갈천의 증손자인 임곡선생은 대군사부로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았다.
그 대군이 임금이 되었으니까 임금의 스승이 된 것이다. 갈천 선생은 효행으로 나라에서 효간공 시효를 내리고, 살아생전에 생『정려 각』을 하사했다는 것은 썩 드문 일로서 그래서 우 안음의 훌륭하신 선생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한다. 하기방학에 후손을 어린 후손을 불러 모아 갈계숲과 갈천서당 에서 짧게나마 전통예절교육을 하다가 쉬었는데 문중차원에서 다시 하려 한다.
자고로 현숙한 부인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오직 정이천선생의 어머니인 後夫人(후부인)은 배울만한 분이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선인께서 내조에 힘입어 예경이 더욱 지극하였다. 어머니께서는 겸손하고 공순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여러 서출들을 자기소생과 다름없이 사랑하였다. 그리고 매 때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노비들 보기를 자기자녀처럼 하고, 혹 그들을 꾸지람하실 때에는 ‘너희가 이 모양인데 커서도 이런 일을 하겠느냐?’고 경계하였으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아이들이 나쁘게 되는 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허물을 숨겨 아버지가 알지 못하게 하는 데에 연유 한다’라고 하였다”
※師父:조선시대의 세자강원에서 교육을 맡은 으뜸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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