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근의사 사적지를 찾아서 Ⅱ
작성일: 2010-07-15
한밤중에 하얼빈 공항에 내려 입국수속 하랴, 짐 찾으랴 시간이오래 걸려 짜증스럽다. 가이드와 미팅 만달소피텔(SOFITEL WANDA HARBIN) 호텔에도착하기 전 차속에서 방 키를 받아 바로 들어가도 자정이 넘었다.
호텔은 조망이 좋고 피곤한 여행객을 맞을 고급인테리어가 호사스럽다. 전화쓰기가 쉽고 면도용거품 등 룸서비스용품도 질이 좋다. 움직이는 동선 또한 헤매지 않게 설계 되어 로비 카페 등 구내시설이용이 편리했다.
하얼빈 풍경 얼핏 스치는 시가지 도로변상가 간판이 질서정연했다. 돌출간판이 거의 눈에 뛰지 않아 물어본즉, 큰돈이 들어 쉽게 달수 없다는 말로 봐 광고물 설치가 관허제인가 보다. 그 규격 또한 작고 가로등이나 일정한 자리에 붙어 있었다. 눈여겨본즉, 국가기관이나 재벌 집단(GROUP계열기업무리)에서나 달 정도였다. 시가지 상점 간판이나 광고판하나로 도시미관이 돋보이는 것은 공산사회주의국가의 엄격한 통제의 모순이 거리에서장점으로 들어나기도 해 놀라웠다.
태양도공원(호림원)은 흑룡강성 지방정부에서 시베리아 산 호랑이와 멸종위기를 맞은 백두산호랑이 800수를 반 반 인공사육, 야생적응 훈련을 시켜 자연으로 되 돌려준다는 취지의 호랑이보호 시설이다. 난생처음백호도 봤다.
한 마리당 쇠고기 20키로 닭 두 마리가 하루치먹이로 죽지 않을 정도이고, 예산부족으로 배를 골린다며, 관광객이 먹이를 사서 주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임에도 백두산호랑이멸종을 막아 주어, 남 북 통일 후 휴전선 산길이 열리면 산짐승도 오고갈 테니까 그 사업추진에 감사할 뿐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정각,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 도착하고 있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안중근 장군은 대합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가 일본인 환영객 틈에 끼어 잽싸게 플랫폼으로 나가서 러시아군 의장대 뒤 일본 거류민단 환영객 틈에 석였다.
당시의 강제적인 한일합방을 앞둔 조선의 정세는 급박했다. 조선침략의 원흉을 제거하기 위한 안 의사의 권총에서 그날 하얼빈역사를 진동한 魁帥괴수 이토 히로부미 등을 저격 처단한 총성은 모두 7발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하기 전에 써놓은 유서“동포에게 고함”에서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위하여 3년 동안 풍천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느니 우리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술국치의 해이기도 한 1910년 3월26일,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여순 에는 아침부터 짙은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서 쓸쓸 한 최후를 맞았으나, 안 의사의 모습은 의연하고 장엄했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 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소. 살아서 백년을 사는 이 없는데 그대 죽어서 천년을 사오.” -당시 중국국가주석 원 세 개의 찬양 시 중에서-
안중근 장군이 순국한 뒤 중국 동북일대 소학교에서는 중국인이 작사 작곡 한 <안중근을 추모하며>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진실로 공경할만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자신도 용감히 죽었다.
마음속으로 비로소 나라의 한을 풀었다.
역사 속에 충의 혼을 우러르지 않을 자가 없었다.
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누가 그 뒤를 따르랴.
누가 그 뒤를 따르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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