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근 의사 사적지를 찾아서 Ⅲ
작성일: 2010-07-22
여행 3일째, 오늘은 늦잠을 청해도 될 만큼 아침 일정이 여유롭다. 호텔주변을 한 바퀴 산책하고 나서 식사 후 여장을 꾸려도 됐다. 휴대전화가 자동로밍 되어 전화를 받거나 걸려고 하면 중국말만 나와 헤갈 린 다. 알아보니 하얼빈은 거의 난청 지역이라고 했다.
아라비아 상인을 찜 쪄 먹을 중국인상술, 관광객이 많은 장가계 기암괴석 바위군 깎아지른 낭떠러지 신선이 금방 나올 것 같은 골자기 속에서도 팡팡 터졌고, 근 15전 백두산부근의 푸세식 뒷간에서 남의엉덩이를 보면서 일을 보던 그 시절에도 길림성훈춘 시, 도문, 이도백화백두산북파산문인 산간벽지에도 휴대폰은 통했다는 기억이다.
대만 홍콩을 비 롯 10여회 중국 圈(권) 여행을 해봤지만, 손 전화가 안 되는 답답함의 하얼빈은 안중근의사의 사적을 찾아 한국사람 이나 이따금씩 오고 일본인이 가끔 찾는 우리에게는 역사적소중한 사적지인 반면에 국제적으로 뜰 수가 없는 조건의 관광 상품이기 때문이라 짐작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일본제국주의의 세균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세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 공영권” 정책의 산물이다. 일본은 식민지 제국을 세우기 위해 아시아 여러 나라의 희생을 댓 가로 세균전을 조작하였다.
9.18사변 후, 일본은 세균실험기지를 중국동북지역 하얼빈 난강구에 이이시 부대가 비밀리에 설립했다.
그리고 하얼빈에서 70키로 떨어진 헤이롱장성 베이인허에 부속실험실도 세웠다. 그러나 관동군 내에서는 ‘가모부대’, ‘도고부대’, ‘이시이 부대’로 통했다.
베인허의 세균실험실은 추마대위가 직접 관할하여 ‘추마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곳은 바깥세상과 격리된 금지구역이었다. 그러나 훗날 추마성의 감옥에서 폭란이 일어나고 동북항일 연합군 제3군의 습격을 받으면서 추마성의 비밀이 드러나게 되었다. 심한 타격을 받은 이시이 시로는 세균실험을 중단하고 실험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1935년 이시이 시로는 추마성의 실험실을 폭파시키고 모든 시설을 하얼빈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는 더 큰 음모를 하얼빈 핑팡에서 펼칠 계획 이었다.
이시이로의 계획은 히로히토 천황의 허락을 받았다. 1936년 5월 30일, 히로히토 천황은 육갑 제7호 군령을 반포하였다. 그해 8월 이시이 부대는 정식으로 작전 부대로 개편되었다. 이 부대는 명목상 관동군에 편성되어 있었지만 비밀보안을 유지하기위한 사실상 일본 참모본부의 직접 지시를 받는 정원 3,000명으로 편성된 특수부대 였다.
1941년 비밀과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시이 부대는 번호를 이용하여 ‘제731부대’로 명명하였다. 제731부대의 소장은 이시이 시로(1936년~194년 7월), 기나토 마시지(1942년 8월~1945년 2월), 이시이 시로(1945년 3월~8월)가 맡았다.
이시이 시로는 제731부대의 소장을 역임하면서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시이 시로는 동물, 식물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까지 세균실험에 이용하였다. 세균전과 유행병의 원리를 밝힌다고 마루타(사람을 나무 토막 취급)를 이용한 생체실험은 실내외를 막론하고 진행되었다.
일본군의 각 세균부대와 육군병원은 모두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수 천만 명의 포로를 살해했다. 이런 731부대의 죄악의 실험대상은 중국인,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 미국인, 영국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실험의 재료로 사용된 마루타 들은 국적, 나이, 성별 등이 제각기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살아남지 못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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