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안중근의사 사적지를 찾아서 Ⅵ

작성일: 2010-08-26

오늘 하얼빈에서 대련이동비행시간이 국내선 비행기라 작아서 우리 단체는 한 시간 간격 두 대에 탑승했기 때문에 시간이 꼬여 초저녁잠의 나는 피로가 엄습했다.
산동항공편으로 대련공항에 내려 차속에서 프라마 호텔(FURAMA HOTEL)방 키를 받아 잽싸게 움직여도 한국시간 새벽 2시경이었다. 이 호텔은로비만 같이 쓰는 쌍둥이 건물로 동간 엘리베이터만 달랐다. 경호가 용이해서인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옆 동 전부를 사용한 그 고급 호텔에서 두 밤을 묵었다.
고구려 卑沙山城(비사산성)에 올랐다. 드라마 대조영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수 천 년 동안 싸인 회포라 할까 착잡하기 그지없다. 중국에서는 대흑산성이라 불러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고구려 때 축조된 성이지만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요녕성 진저우 유이향 동쪽의 대흑 산 주위에 쌓은 거대한 석성으로,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천혜의요새지였다.
《삼국사기》에는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서문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옛날 고구려가 쌓아 축성방식이 다른 약간의 성이 남아 있어 그나마 푯대가 된다. 예로 우리는 우리보다 큰 나라사람을 얕잡아 비 존칭어인 떼놈, 왜놈, 로스케 놈, 양키 놈들이라 했고, 작은 나라보고는 월남사람, 아프간사람, 아프리카 사람이라 했지 놈이라 하지 않았다. 떼놈들 노는 짓이 좀스럽고 비열하여 지금 세계2위의경제대국이라 하나 머지않아 풍선 터지듯 자멸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산성에서 회원한명을 잃어버렸다. 외국 나들이 초행인 조 모 씨는 술꾼이라 겁 없이 한국인양 혼자 술집 찾아간 것을 모르는 일행은 회원한사람 떼놈臟器(장기)사기단에 홀렸다고 난리가 났었다.
旅順日俄監獄구址陳列館(여순일아감옥구지진열관)이라 해서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은 법정과 수형생활을 했던 감옥, 형장 및 기타 자료가 그대로 보존 전시되어 있었다. 광복회 내에 친일분자가 신분세탁잠입 하여 애국지사 행세를 한 오점을 남겼고, 생존지사들 또한 철 밥통 고수에 여념이 없지 않아, 친일세력의 틈바구니에서 국민들이 경원시 한 것도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의 일면이었다.
그러나 광복회는 애국지사 후손의 저력으로, 엄청난 노력의 결실로 중국정부로 하여금 여순 재판소와 감옥 등 자료보존과 안중근 의사 동상을 모신 추모 관 운영의 결실을 맺은 성과에 대하여 본회집행부에 감사하는 바이다.
돈 나고 사람 난 오직 돈밖에 모르는 중국사회에서 영원토록 안중근 의사의 유적을 보존 유지하려면 우리국민이 모쪼록 많이 찾아가 추모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 길 밖에 다른 묘수가 없을 것 같았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맺고 한일합병을 선포하였다. 이와 같이 이토의 추진으로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를 처단 후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임으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병참모중장의 의무로 소임을 뛰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이토를 처형 포로가 되었다고 반박하였다. 그래서 마땅히 국제공법에 의하여 각 나라사람들 앞에서 공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안중근장군은 일제의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다음의 15가지로 열거하였다.
①한국명성황후를 살해한 죄 ②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③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④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⑤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⑥철도, 광산, 산림, 천택(하늘의 은혜)을 강제로 빼앗은 죄 ⑦제일 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⑧군대를 해산 죄 ⑨교육을 방해한 죄 ⑩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⑪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 ⑫한국인을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⑬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 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⑭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⑮일본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상을 법정에서 열거하여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가 저질은 죄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침략자에 대한 응징은 당연한 귀결이고 안중근의 의거는 침략자를 반대하는 정의의 투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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