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안중근의사 사적지를 찾아서 Ⅶ
작성일: 2010-09-02
우리민족 1만년역사를 주장하는 고문헌의 한 구절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북애자 의《구원사화》서문 중에서-
중국동북지역 옛 만주(간도)는 길림성 러시아연해주사할린(鹿屯島녹둔도)이 북간도인데 조선에서는 간도파출소장을 파견하여 다스렸던 우리의 구영토이다.
이와 같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이칼호수 부근에 고구려 칸이라 부르는 부족이 동명왕을 모시고 있고, 또 박혁거세의 무덤도 중국에서 발견되었고, 연개소문장군 또한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산동성 묵시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중국에는 아직도 고구려 고 씨가 살고 있고, 중국의 서울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 조선의 땅(古土)을 10여 시간이상 버스로 달려가도 끝이 없는 선대가 잃어버린 흔적의 발자국을 더듬는 감회에 울컥하는 분한 마음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다.
알콜 농도 70도의 중국 빼 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흐트러짐이 없이 취할 줄을 몰랐다.
나의 이름 林扶陸은 수풀‘임’, 붙잡을‘부’, 육지‘륙’ 자다. 한자풀이가 말해주듯이, 이것은 북경대학교출신선친이 선대가 잃은 땅(失地) 중국의 넓고 큰 땅(大地)을 회복하라는 ‘단언적 지상명령’이 물거품이 된 지금. 나는 안중근 의사가 가신 거룩한 길을 차마 맨 정신으로 돌아 볼 수가 없었다.
고향을 떠나면서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결의를 다지고 동생정근에게 시를 지어주었는데, 당시의 안중근의 내심 정감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 남아장부 큰 뜻을 품고 양관을 나서니
살아서 성공을 못하면 죽어도 돌아오지 않으리
유골을 어찌 조선의 무덤 아래에 묻으려하랴
인간세상은 도처가 청산이네
안중근은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던 희생된 전우들을추모하고 또 역정을 전승하고 있는 동지들을 고무하기 위해 시를 지어 읊었다.
▣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늙은 도적놈을 처단하려고 한다. 안중근의 결정에 유진율과 이강은 충분히 긍정하면서 필요한 협조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튿날 관련지사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거사를 논의 하였는데 이또 가 경유할 곳에 우덕순·조도선·유동하가 체가구역, 엄인섭 해삼위역, 강갑산은 쌍성자 역, 마지막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 각각 거사를 할 준비를 결정하였다. 출발하기 직전에 지사들은 안중근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합창하였다.
▣ 이또 도적놈의 말일이 이미 왔다.
단지하여 보국을 맹세한 이.
백의동포 만세 소리,
오대주 대지를 진감하네.
거사 후, 안중근의사는 사형판결을 받고 순국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최후의 유언을 남기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고.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감옥에서 그는 《안응칠 역사》란 불후의 영웅 기를 남기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어 32살에 거룩하게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비록 짧았으나 그의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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