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장경 불사의 의미

작성일: 2010-12-03

불교에서 삼보(佛, 法, 僧)를 불교의 경전대장경이라 하고 藏(장)자를 쓴다.
장은 산스크리트어 피타카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이는 광주리란 뜻이다. 초기 불교당시 종이가 없었던 시대엔 나뭇잎에다 경을 써서 광주리에 담아 보관했기 때문에 경을 ‘장 피타카’라고 했다.
또 대장경을 『트리피타카』라고도 하는데 크게 나누어서 세 가지 문헌 이른바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三藏)을 이르는 말로 즉 ‘경’은 붓다의 제자와 중생교화를 위한 교법의 보은경전이요, ‘율’은 붓다의 제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율장이며, ‘논’은 경과 율을 붓다자신이 설법한 것에 대하여 연구하고 조직적으로 논석(論釋)하여 모은 것을 일체경(一切經)》, 《大藏經》이라한다.
『고려대장경』은 영어로 “트리 피타카 코리아나 Tripitaika Koreana”라고 쓰는데 고려의 심장이라는 뜻이 담겨있고, 이 대장경이 전란 때 만들어 졌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신봉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불교신자였다. 백성을 단합시키고 부처님의 가호아래 전쟁을 치러야할 터인즉 부처님이 우리의 편이라고 주장하는 좋은 방법을 택해 고려대장경을 판각하게 된 동기였다고 짐작케 한다.
대장경을 만드는 공덕으로 고려는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한결 안정된 마음을 갖고 생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언하여 대장경은 당시 고려인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우는 구심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고려국가 시책을 몽골군도 첩보에 의해 잘 알고 있었기에 1232년 2차 침입 땐 몽골군대장 샬례탑이 대장경을 불질러버렸고, 그 때 승병장 김윤후(金允)가 쏜 화살에 맞아 개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몽골군은 굳이 대구까지 내려와서 대장경을 불태워 버렸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은 몽골군대가 『高麗大藏經』이 고려인의 국론통일,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고려대장경을 제거함과 동시에 황룡사 구층탑도 같이 없앰으로써, 고려의 국론분열에 전력경주 했던 것이다.
고려가 전란 중이었지만 경판제작 역사(役事)를 16년이나 계속했다는 절박했던 나라의 시책에 주목하게 된다. 이때 만든 대장경판은 한 면이 23줄에 각줄엔 14자를 판각했다.
그리고 경판의 크기는 가로70㎝, 세로24㎝이고 두께는 2.8㎝요 무게는 대체로 2,830g에서 3,400g정도로, 경판수는 81,258장이라서 팔만대장경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중에 121장은 겹쳐있고 한다.
또 양면에 판각을 했으니까 전체면수는 162,516면이 되고, 각 면에 322자의 글자를 새겼으니 총 숫자는 5천2백만이 넘는 엄청난 글자 수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와 버금가니 우리조상이 文字에 대한 열의는 대단타 할 것이다.
그뿐인가, 굵은 통나무 하나가 경판6장감이 나온다고 볼 때 통나무가 1만5천개 이상이 소모되었다는 계산이다. 또 목판에 붙이는 원고만 해도 하루에 한사람이 1,000자 정도를 쓸 수 있다고 보면 연인원 5만 명 이상이 필요했고, 한지도 평판 면이 16만장 넘으니까 파지도 어림잡아 3배인 50만장이 들었다는 추산이다.
이렇게 보면 하루 한사람이 쓸 수 있는 종이가 50장 정도이니 종이 만드는 데에만도 1년에 1만 명의 한지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가장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 판각이다. 한사람이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각자 수를30-50자로 잡으면 5,200만자 로 적게 잡아도 125만 명이 필요한 수치다.
판각이 다된 경판에 칠하는 옻이 한 장에 5g정도이면 하루 채취량이 150그루에서 400g 이 되니, 400㎏을 채취하려면 연인원 천명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이외에도 인쇄, 교정, 구리 장식공 등 만드는 보조 인원만도 상당히 필요했다. 따라서 이사업은 고려500년 역사를 통해 가장 큰 국책사업의 대 佛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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