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林氏 세거지 은진, 부여를 가다

작성일: 2010-12-17

씨족의 뿌리인 그 본향을 본관(本貫)또는 향적(鄕籍)이라한다. 이는 즉 시조(始祖)가 뿌리를 내리고 산 곳 을 지칭하는 말인데, 환언하면 본관은 시조나 중시조의 출생지를 세거지(世居地)로 설정하여 삼아서이다. 이를테면 관향(貫鄕)또는 본향(本鄕)이라고 쓴다.
저의 경우 성이 林가라하면 어김없이 본을 묻는데 은진(恩津)이라고 하면 그곳이 어디냐고 되묻는 말을 몇 번도 더할 때 어설픈 대답을 해준다. 옛말에, “슬기나자 노망들고 철들자 죽는다.”고 하듯 늘그막에 나의조상 ‘관향’을 찾아 나서니 문득 생각 키는 미국의 흑인작가 A. P. 헤일의 다큐멘터리 “아프리카 노예후손 킨타쿤테의 뿌리 찾는 과정의 힘겨운 이야기며,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 일본 노예시장에서 이탈리아 신부가 사서는 시실리 섬으로 데리고 가 정착한 안토니오 꼬레아 일가의 뿌리 찾는 애환에 비유하면 늦은 감이 있어 한편 부끄러웠다.
백두에 흰 머리카락 날리며 달포 전 恩津林氏의 世居地인 충남 논산시 은진면 중시조큰집묘역을 난생처음 참배하고, 예랑공파 본향을 찾아보는 뜻 깊은 여행을 가졌다. 작은집 의령공파는 경남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치내마을에 자자손손 뿌리내려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은진임씨 의령공파 대종회에선 <恩津林氏宗報>를 발간하려고 우선 큰집 측의 의향을 들으러 간 걸음이라 은진면장과 은진임씨의 발자취에 대하여 노변정담을 갖게 되어 기뻤다. 기사를 대동하여서 마음 놓고 은진막걸리도 한잔하곤, 면내 천년고찰 관촉사도 탐방하여 사찰의 역사도 듣게 되었다.
우뚝 선 고려전기불상 석조미륵보살입상 일명 은진미륵상은 고려불교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걸작 품으로 ‘우리 은진 임씨 가문엔 하나의 심벌마크(Symbol mark)가 된지 오래다’ 미륵상 불사는 오로지 불상공예가의 수작업으로 정으로 쪼고 망치로 다듬어 조성했다니 그 공덕 어찌 돌부처가 미륵보살로 환생하지 않으랴 싶다.
내친걸음에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도 둘러봤다. 옛 공주읍지에 부여현 관아 동쪽에 백제시대 왕릉이 사비외곽성인 나성밖에 16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금동대향로가 출토 되었고, 창왕 즉 위덕왕의 명복을 비는 사리도 나왔다고 한다. 이어 공산성을 맴돌아 백마강나루터서 돛단배를 타고는 강 건너 부소산 바라보며 낙화암을 스쳐 고란사에 닻을 내렸다.
낙화암은 백제가 패망하면서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슬픈 전설로 얼룩진 절벽이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 즉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로 기록이 되어있어 이것이 역사와 전설의 차이점인가 싶다.
고란사 뒤편의 정화수약수는 백제왕들의 어용수(御用水)였단다. 임금님이 고란사약수를 드실 적엔 약초 한 닢을 뛰워 마셨다는 고란초에 대해서는 조선조 세종 때 편찬한 『향방약성대전』에 수록되어 있다.
고란초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백마강 하류에서 강물을 마셔보고 물맛으로 상류에 고란초가 있음을 알았다”는 신비의 영약여러해살이 풀이다. 고란초는 고사리 과에 속하며, 한방에선 화류병(花柳病:성병을 달리 이르는 말)에 효험이 있는 풀로 여긴다. 거창군 종합사회복지회관 가곡교실 에서 배운 창가(唱歌)를 은연중 흥얼거렸다.

백마강
사비수 나린 물에 석양이 빗길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 예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패망의 역사이고 뒤돌릴 수 없는 역사지만 한 많은 그 세월 그 역사를 간직한 곳이 부여 공산성이고 부소산성이며 백마강이다. 유서 깊은 저의성씨의 고향 논산 공주 부여를 찾은 감회가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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