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국의 성립
작성일: 2011-03-24
古 문헌 『관자(管子)』의 기록에 고조선이 등장하는 시기는 중국만주(간도 연해주)지방에서 청동기 문화가 개화되는 기원전 7~8세기 이후 이때부터를 조선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고조선은 예(濊) 와 맥(貊)이라는 부족이 사회적·정치적으로 뭉쳐서 이뤄진 부족국가이다.
이 종족이 청동기시대 비파형 동검문화를 이루어 고조선의 대표문화로 형성이되었다.
비파형 동검문화란 요하(遼河)를 경계로 요서(遼西)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大凌河 동쪽 요동(遼東)지역에 분포하는 청동기 문화와 대동소이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때 요동지역에서 한반도까지 활동하던 집단이 예맥족이고 이들이 세운 나라가 고조선으로 보는 것이 정통이다.
문헌에 따르면 청동기문화단계의 요동 지역에는 예맥으로 불리는 여러 종족이 거주하였고, 고조선은 예맥과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까지 거주한 것으로 나온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 볼 때 요동일대에 산재한 탁자식 북방식 지석묘 석관묘 미송리형토기와 청동기문화는 예맥족과 고조선의 문화와 특징적으로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허나 논란은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선태(先泰)시기이래 요하 동쪽에서는 모두 濊貊族이라는 동일계통의 씨족집단이 대체적으로 비파형동검문화권 특색을 가지고 성장한 것이 고조선인 것이다.
夫餘는 만주에서 일어나 700년 이상 지속한 예맥국가였다. 부여가 우리의 고대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부여의 터전은 중국동북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다.
그 집단은 압록강일대에 진출하여 졸본부여, 곧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살던 부족들 중 일부(비류, 온조집단)가 다시 남으로 내려가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세웠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 했고, 동명사당을 두어 부여를 세운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서기6세기중반에는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개명하였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 백제의 뿌리 구실을 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불릴 정도 였다.
최근 경상남도 옛 가야가 있던 지역에서, 청동 솥을 비롯해 북방유목민족이나 부여계통의 유물들이 나오는데, 부여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된다.
나아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시조 대조영도 발해는 ‘부여’ ‘옥저’ ‘변한’ ‘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을 하였고, 부여를 자신들의 오래된 조상의 나라로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부여의 역사는 우리 고대국가의 출발점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으며, 부여족은 우리 겨레를 형성한 주종족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힘의 논리로 동북공정이후 신라까지도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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