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일제강점기

작성일: 2011-08-25

요즘 젊은 세대들이 8.15해방에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15일 초등교앞을 지나니 동창모임으로 山海진미, 주지육림에 남녀노소 웃음소리를 들으니 1945년 8월15일 당시 감격과는 사뭇다른 풍광에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역사란 한시대의 박제된 이야기나 골치아픈 연대기, 역사적 인물을 회억코는 슬픈 감정에 잠길수는 없지만 허나 왜놈들 총칼앞에 굴하지않고 자기한몸 초개시한 독립지사들의 고초엔 측은지심이 들었다. 1910년10월1일 왜놈대장 데라우찌가 한국을 강점, 민족의식말살로 조선역사서를 불태운 분서갱유에 이름도 개명시키곤 국민학교선 일어만 강요했으니 반만년 유구한 역사가 초로처럼 사라졌고 고종은 태황으로, 순종은 李王으로 명분만 세워주곤 朝鮮을 13道12部317개郡으로 쪼개어 친일파 76명은 공작,자작,후작을 부여받곤 왜놈들의 꼭두각시 놀음을 하며 호의호식에 高枕安眠하나 백성들은 36년간 주인이 종이된 혹독한 머슴살이가 시작되었다.
한일합방 비보가 전해지던날 애국청년들은 국권상실에 공분, 자살자가 속출했으니 금산군수 홍범식, 러시아공사 이범진, 진사 황 현, 병조판서 장태수, 사간원 정 은, 판관 소도윤 등은 할복자살을 하거나 곡기(穀氣)를 끊고 음독자살을 하였고 안중근弟 안영근과 김 구, 윤치오, 양기탁 등은 총독암살 도모에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니 형판위 나신을 묶곤 ‘쇠좃매’로 치면 궁둥이살이 떨어져 나가고 신체에다 담뱃불로 지지니 막고함을 치자 “요놈 살았네” 하면서 코에다 문종이를 겹쳐놓곤 물을 부으니 숨질이 차 죽어갔으니 ‘白紙死’란 그런 고문이었다. 36년간 왜놈들의 만행은 이뿐이랴. 애국청년들의 사지를 끊거나 피를 빼곤 돼지피로 수혈도 해보고, 벽관에 세워서 재워도 보고, 눈알이 튕겨지도록 거꾸로 매달아 두거나 엄동설한 청바닥에 잠을재우니 몸은 고드름이 되었고 유관순은 알몸에 주리를 트는등 온갖 생체실험으로 독립투사들은 죽어갔고 부황든 백성들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일본농업이민 동척회사는 조선인의 문전옥답을 모조리압수 왜놈들은 지주가, 우린 머슴으로 주객이 전도되어 자갈밭 박전박답에 뼈빠지게 일만하곤 알곡은 일본으로 실어갔으니 농민들은 보릿고개 麥嶺땐 시라기갱죽, 초근목피로 피골이 상접하여 폐병얻어 객혈타 죽어갔으니 오호 통재로다!
居昌에도 관청외 과수원이나 정미소, 못, 활판소 조철차간등 모든요직은 전부 왜놈들 소유로 우린 그들의 노예생활 연속이었다. 필자는 밤에 형님을 따라 강양里 못에(現아세아철공소)조개잡이를 갔다가 왜놈이 죽창들고오는 통에 옷도 못입고 도망친 기억이나 지금도 눈물이 난다.
당시 우리민족은 춥고, 배고파 죽지못해 왜놈들 기방엔 19年 아가씨들 賣笑매춘소리 요란하고 남자들은 하와이 노예이민으로, 만주나 일본등지로 일자리 찾아떠난 백성들이 수백만, 만주서는 집이없어 토굴에서, 일본서는 탄광에서 숙식을 했었다니 그게 생지옥 아니었나.
지금도 구주탄광벽엔 ‘엄마 배고파요. 조선에가고싶다’는 낙서가 있다하고 애비가 죽은 자식의 人肉을 먹곤 연명했다는 기록은 인간비극의 극치아닌가. 1917년 당시 쌀한가마 15원이던것이 1919년大戰의 전쟁비축물로 38원이었다니 男부女대라 부부가 개나리 단봇짐에 이향객지 떠도는 거지떼 노숙자들이 부지기수 였었다.
고로 1919년3월1일 민족대표 33인은 독살당한 고종의 장례식을 기해 탑골공원에 모여든 군중들께 독립선언문을 다급히 인쇄하여 배포를 하니 (오등은 자에 아 ‘鮮朝’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고 오기를 했던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