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고려풍 몽골풍
작성일: 2011-09-08
우리는 몽골의 어느 박물관이 던 탐방해보면 어김없이 우리나라 것을 빼닮은 담뱃대(煙竹연죽)와 담배통을 보게 된다. 거슬러 올라가 ‘고려 풍’을 타고 들어간 ‘조선 풍’이라는데 풍(風)이라면(일부명사 뒤에 붙어) ‘풍속’, ‘양식’, ‘풍모’,의 뜻을 지닌 접미사로 일명 유행이랄까 사회적 풍조나 경향을 뜻한다. 조선 땅에(1636-37) 심한 우질(牛疾)인 구제역 병이 돌아 소전염병이 돌아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자, 인조임금은 성익을 몽골에 보내 담배와 소를 바꿔 오게 했다. 성익은 몽골 의 여러 기(旗:몽골의 정치군사 단위)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가 추위와 정신집중에 유효하다고 설득하여 몽골의 소와 담배를 바꾸는 물물교환을 성사시킨 구상무역(求償貿易)초석을 쌓은 성공담이전해지고 있다. 고로 몽골의 소가 오늘날 한우의 원조 격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7세기 중엽부터 몽골에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라마교의 나라 몽골에서는 승려는 흡연을 불허했기 때문에 돌로 만든 작은 통에다 담배가루와 향료를 넣고 코로 들어 마시는 이른바 ‘코담배’라는 독특한 흡연법이 생겨났고, 그리하여 귀족들은 물론 일반 농목민들까지도 따라함으로써 하나의 사회풍조로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하고, 이로써 만날 때 마다 코담배를 교환하는 인사법이 유행했다고 한다.
아이러닉하게도 몽골의 ‘고려풍’과 때를 같이했는데 이는 민족의 이주나 침략에서 일어난 문화교류가 고려의 ‘몽골풍’이다.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문화영역의 교류가 일어났으며 그 유행의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원래 고려인들은 윗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袍)를 입었는데, 이때부터 윗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해 이어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잡아 활동에 편한 몽골식 철릭(帖裡 첩리: 몽골풍의 관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모(禮帽)로 남아있는 여성들의 족두리는 원래 ‘고고(姑姑 顧姑)라는 몽골여성들의 외출용 모자였다. 신부의 뺨에 연지를 찍는 화장술도 ’몽골풍‘이다. 상투대신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머리를 깎고 가운데 머리를 뒤로 따아 내리는 이색적인 몽골식 개체변발(開剃辮髮)도 한때 유행했다.
음식문화에서도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육식을 꺼려했으나 몽골인 들의 영향을 받아 쇠고기를 넣은 만두 같은 육류식품을 먹게 되었단다. 따지고 보면 즐겨먹는 쇠고기국인 설렁탕도 ‘몽골 풍’ 라는 설이 있다. 제주도를 통해 조랑말이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란다.
그 밖에 우리말로 굳어진 낱말들에서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왕과 왕비에 붙이는 존칭어 ‘마마’, ‘마노라’ 세자와 세자빈을 가리키는 상전, 마님, 임금의 음식인 ‘수라’ 등 몽골출신 공주들의 활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서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에서 어미격인 ‘치’는 ‘다루치기’(達魯花赤,관직)나 ‘조리치’(청소부)‘ 시파치’(매사냥꾼)같은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어미 ‘치’를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몽골간의 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문명이지만 생산적인 융합이 이루어 질 때 문명 본연의 서로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교류가 실천가능하며, 문명은 모방성이라는 근본속성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 <실크로드를 가다>에서 발췌를 하여 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