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술로 신세망친 선비

작성일: 2011-11-17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 인심이 후해선 낯선 사람과도 주저 없이 술잔을 주고받곤 한다. 때론 사양함에도 불구(不拘)하고 무례하게 권하여 더러 목숨까지도 잃은 예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살인음주문화의 추방 캠페인’을 벌여서 막무가내이던 음주문화가 점차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음주강요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서당“신입원환영회 폭음사건”과도 비슷한 사례가 숙종 17년(1691)6월6일자에 그 사건 기록이 있다.
“영의정 권대운 공이 하명을 받고 나오니 입시한 승자와 사관들 게 주안상을 내리도록 했다. 혹 더는 마시질 못한다고 사양을 하면 임금이 억지로 권주를 했다. 사관 홍중정은 차례로 오는 술잔 외에도 더 마시겠다고 청하기도 하니 임금이 양껏 마시도록 허락을 했다한다. 홍중정은 술을 너무 즐겨 일을 돌보지 않았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다”

정조16년(1792) 3월 2일에는 희정당에서 낭자한 술판이 벌어졌다. 임금이 성균관 제술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린 것이다. 음주에 앞서 임금의 훈시가 오늘날 ‘음주강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예다.

“옛 사람들 말에 술로 취하게 한 후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했으니 너희들은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을 말고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愼機)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만하다. 내각과 승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들게 하라. 승지와 규장각 관원이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고 했다는 기록이다.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오도일은 천하의 술꾼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그는 임금이 태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몹시 취해서 신하들이 부축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를 파직하자는 상소문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때마다 숙종은 술에 취하면 그럴 수 있다며 이해한다.
그러나 오도일은 결정적으로 큰 실수를 저지른다. 임금이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사직단에서 기도를 할 때 술에 취해 넘어지면서 음복주를 엎지른다. 오도일을 싸고돌던 숙종도 기우제를 올리는 자리에서 음복주를 뒤엎은 행동에 대해서는 묵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숙종은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大小 제사에 예를 갖출 수는 없겠지만 기우제는 더더욱 깨끗이 해야 한다. 어제 사직단 행사 때 오도일은 술기운이 안면에 가득차고 행동거지가 괴이했다. 금주령을 내렸는데도 며칠 동안 술 끊는 것이 어려워 군부(君父)앞에서 방자하게 취했으니 극히 한심스러웠다.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곳에서 엎어질까 두려워했는데 결국 음복주를 엎지르고 말았다. 그런데도 기운이 없음을 핑계대고 있으니 누구를 속이려는 가. 의금부에서 오도일을 잡아서 처벌하라. 결국오도일은 그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가 숙종29년(1703) 2월 14일 장성에서 죽었다.

필자는 혈압증세로 두통이 나면 술을 마셔야 하는데 약술이긴 하나 오랜 동안 주량이 늘었다. 큰일을 낸 적은 없으나 엄한 교통법규 하에 운전은 해야 되고 행여 술로 창피함을 당할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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