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판 孝子
작성일: 2012-05-17
일연의 ‘삼국유사’설화에 승려 혜통이 출가한 내력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본디 이름은 모르고 속가에 살 때 집이 경주남산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냇가에서 수달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살은 발라먹고, 뼈는 뒷동산에 버렸다한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뼈는 사라지고 없어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뼈가 전에 살던 동굴로 되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껴않고는 쪼그리고 앉아있더란다. 그 광경을 보곤 놀랍고도 기이하여, 한참 탄식하다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出家를해 혜통으로 법명을 바꿨단다.”
달마가 동족으로 간 까닭은 몰라도, 혜통이 절로 간 사연은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몸은 죽어 뼈만 남았건만, 차마죽어 있을 수 조 차 없는 어미의 지극한 자식사랑을 목도한 때문이다. 그걸 아는 까닭은 새끼들은 뼈만 남은 어미가슴에 파고들어 젖을 찾아 울고, 죽은 어미는 그 자식들의 울음에 따라 울었을 것을 연상하니 이런 어미의 사랑을 자애(慈愛)라 하고, 우리말로는 ‘내리사랑’이라고 일 컷 는다.
모친이 낙상 후 행동이 어눌하여 큰 병원을 여러 번 갔으나 뇌 C T촬영에서 이상 없다는 진단이 나와 다섯 번째 M R I사진검진결과 뇌졸중대뇌파열로 운동기능이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온 실낱같은 의식으론 소생불가능으로 보였다. 왼 종일 병상에서 간병인 보호를 받아야 했는데, 하루 5시간 인건비가 월 2백5십여 만원이여서 대책을 세운 것이 45세에 공직을 사퇴 24시간 밀착간병을 하는 ‘신판 효자’를 하게 되었단다.
길어야 한 3년 작정 한 것이 9년째에 접어들었는데 나를 낳아 길러준 父母이기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실 때 까지는 전념키로 작정을 했단다. 간병사보다 자식을 어머니가 더 원하여 더욱 발 빼기가 늦었다고, 동생들은 한목소를 낸다. 생각이 없는 환자는 오빠가 좋을 테지만, 55세 노총각신세 면키 어려울 것 같아 오빠의 인생이 한 한없이 불상하다는 넉두리와 푸념이다.
세간에선 병원을 허가 낸 도둑이라고 하지만 강조하기를 “병원 측에선 고액수가의 진료를 권유하지 않는 경향”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뇌졸중 증세의 환자는 병원엘 3시간 안에만 가면 소생가능 타는 말도 운수가 좋을 때 일뿐, 응급실에도 환자가 넘쳐서 하루를 넘기는 예가 허다하고, 심야에 의사가 없으면 기다리는 방법 외에 다른 수단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눈덩이같이 붓는 병원비를 절약하려고 간병을 시작한 게 전업이 되었단다. 환자가 딸들에게는 눈 한번 마주쳐 주지 않는 것으로 봐 정신은 그나마 살아있고, 아들과는 의사소통이 되고 있었다. 간호사, 간병인에게 배우고 간호조무사 교육을 받아 간호사지시에 따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대소변을 본 후 꼭 물로 씻겨야만 욕창이 예방된단다. 하루에 여러번 몸을 돌려가며 닦아 주어야 하는데 돌려 누이기가 힘에 벅차 허리에 통증이 와도 진작 자기 몸은 돌볼 뜸이 없었단다.
술 한 잔 하자고 권하니까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고 했다.
자기인생을 포기하고 오직 어머니에게 올인(all in)하는 그이가 열악한 병원생활에 폭삭 늙어 보였다. 맨 정신으로는 가슴 짠하여 낮술한잔 걸치지 않고서는 배길 도리가 없었다. 세상살이에 힘겨운 마음의 불구자는 나로써 족하련만, 심각한 그이를 보고선 왠지 마음의 평정을 겨누기가 어려움은 연민의 정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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