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판관 포청천

작성일: 2012-05-24

包靑天은 중국 송나라 때의 명판관(明判官) 포증(包拯)의 일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인데 우리나라의 인기드라마<대장금>이나 <허준>같은 명작을 해외에 팔고 <포청천> <주운장>같은 드라마를 사오는 추세이거니 한다. 포증의 字가 希仁이고 어릴 적부터 교육을 잘 받아 성현들을 흠모하면서 효자로 이름난 그는“충성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정의를 지키겠다.”는 입비(立志)를 세웠다.
포증은 39세 때 관리가 되어 30여년간 관직에 몸을 담으면서 그는 초지일관하여 인물됨이 강직하고 권세를 탐내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지여주(知廬州)로 있을 땐 외삼촌뻘 되는 사람이 죄를 짓자, 조금도 사정을 봐주질 않고 의법 처리하여 태형을 가했음에 그곳에는 아직도 “외 조카도 이치에 맞질 않을 때는 외삼촌을 때릴 수 있다”는 포공의 일화가 속담처럼 남아있다. “청탁을 못하는 것은 염라 포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염라대왕처럼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였다.
그는 간언관(諫言官)으로 있는 동안 황족일지라도 과오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탄핵했다. 그 예로 인종이 총애하는 장귀비의 백부와 황제의 장인인 장요좌를 연이어 일곱 차례나 탄핵하고, 인종에게 “사사로이 후궁을 감싸는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포증은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관리로 임직할 때 언제나 백성들을 생각해서 해악을 없애고 이로움을 쫓으려고 노력했다.
지단주(知端州)로 있을 땐 백성들이 강물을 마시고 질병을 얻어 시달리는 것을 보고선 성안에 일곱 개의 우물을 파도록 했다. 또 허베이 성에서는 관가에서 방목할 예정이던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주어 농사를 짓게 했으며, 산시성에서는 소금에 관한 세법을 고쳐 식염의 유통을 원활하게 해 백성과 나라에 이롭게 했다. 후세에 포공을 소재로 한 100편이 넘는 희가극이 있으나 《진주조미》는 그중 백미로 꼽는다.
개봉성에는 혜민하 라는 강이 있는데 호우로 강물이 범람하여 모든 길이 물에 잠겨 백성들이 고초를 당하자 물길이 원활하지 못함은 관리들이 강가에 누각을 지으면서 물길이 좁아졌다고 판단 누각을 몽땅 허물었다하니 그가 재직당시에는 “귀족이나 황실, 환관들도 함부로 그를 대하질 못하고 전전긍긍 하였다”한다.
카이평시 서소문에 명승지 包公祠안에 있는‘지부비(知府碑)’엔 유독 포증의 이름만을 백성들이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이름석자가 파여지고 지워졌다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봉부는 포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포증으로 인해 개봉부는 평민들의 마음속 성전(聖殿)으로 격상될 수 있었고, “청렴하고 정직해서 법을 신중히 집행했다”는 명성과 탐관오리들의 비행을 막는 부적 격 같은 역할을 하였다한다.
황제가 포공에게 『삼구작도』를 하사했다. 이는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보고할 수 있다는 권한을 부여했다.
청백리 포증은 “자손들 가운데 관리로서 탐욕을 부린 자가 있다면 본가에 들이지 못하게 하곤 내가 죽은 후엔 큰 무덤을 만들지 말라하였으며 내 뜻을 따르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 란 유훈을 남겼다한다. 송나라 진덕수의 충고는 “청렴을 법도로 삼고, 인자함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며, 공적으로 마음가짐을 갖고, 일에 임해서는 근면 하라.”하였고 청나라 강희제는 친필로 “청(淸), 신(愼), 근(勤”이라 쓴 글을 대신 들게 나눠주곤 관직생활의 준칙으로 삼게 했다.
이른바 청백리라면 청렴하고 인자하고 부지런해야 하는데, 포공은 바로 이러한 수신(修身)이 출중했기 때문에 청백리의 모범이 되었다는 판관 포청천의 드라마가 어지러운 현세에 귀감이 될 것 같아 새삼 판관 포청천을 들먹이는 것은 세간에 ‘진보’라는 허울 좋은 옷으로 위장 국시를 무시 국민의례조차 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무리들 척결에는 『삼구작도』가 제격일 것 같아서 이글의 주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