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정문(旌門).정려문.홍살문

작성일: 2012-06-14

李태조가 1392년 朝鮮을 건국하면서 정치이념을 옛고려 그대로 계승을 하였으니 그중에서도 유교적 규범을 통치술로 삼았다.
유교의 근간이 1)부자유親 2)군신유義 3)부부유別 4)장유유序 5)붕우유信 이라 즉 信과 義를 중시한 강령이 國家와 家庭에 평화의 초석이 된다고 父子간 孝를, 君臣간 忠을 강조하고 충효사상을 고취시키자는 것. 환언하야 가정의 뿌리는 가족이라 아내는 가정을 위해 내조를, 남편은 국가을 위해 외조를, 자녀는 부모를 위해 효도를 다함에 忠과孝,烈이 어울져 집은 가화만사성 하고 나라는 태평성대 하다는 것. 고로 임금님은 충신과 효자, 열녀를 발굴토록 八道관찰사나 지방수령들께 어명을 내려 예조(禮曺)에 보고토록하고 그 행실을 백성들께 홍보키위해 충.효.열의 직분과 이름을 새긴 정려문을 그 집앞이나 동리입구에 세우도록 작설지전(綽楔之典)을 내리었고 천민에겐 면천(免賤)과 상직(賞職)도 내리곤 벼슬이 있는자는 1급을 더 올려주었으니 효자는 孝에죽고, 열녀는 烈에 죽고, 충신은 忠에 죽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로다.
15세기경 중종은 이복兄 연산군이 폐한 정려문을, 임진난때 왜놈들이 허문 정려문을 다시 세우도록 명했으니 오히려 난과 전쟁은 孝子.忠臣.烈女들을 더 낳게 한 요인을 제공했으니 우리 居昌에도 그런 정려문 비석들이 즐비하다. 現서경병원 뒤 덕곡부락을 절부里라 칭함도 왜병들이 거창엘 침입하여 낭장(郎將) 김순의 집엘 들이닥쳐 崔씨부인의 젖무덤을 만지자 節婦는 곧장 식칼을 들고나와 젖을 끊고는 자결을 했으니 왜병들은 혼비백산 달아났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에 실여 전하고 있다.
거창읍 강양리 비선걸엔 碑가 많이 서있어 김현석 永世不忘비를 읽어보니 그는 단종朝에 거창 현감으로 부임 선정을 했으나 父 김문기와 함께 단종 폐위에 항거타가 三族이 멸한 충신이라 쓰여있어기 오호 비감토다. 그 맞은편엔 孝子 金如加里의 비가 서있으며 여기서 100m쯤엔 창충사가 있으니 이는 거창愼氏 五忠臣을 모신 大제각이다. 1728년 영조왕을 폐위시키려는 난신들 이인좌,정희량의 반군이 쳐들어오자 이들을 물리친 공적을 적은 비석이 200여년 風마雨세로 글자가 마모되어 필자는 제작년 한글漢文혼용의 비문을 새로짖고 忠則無二心이란 비석을 세웠으며 앙진루는 (梁/李)두군수님 배려로 개보수작업과 단청도 5월말로 깔끔히 마쳐줘서 문화관광과의 문화재 보호에 찬사를 보낸다. 경내엔 거창에서도 유일한 “돌지붕”石造정려문이 있어 읽어보니 열녀 愼處宗의 처 수원白氏가 남편의 지병에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먹였으나 끝내 병사를하니 3년상을 치른 후 節婦도 곡기(穀氣)를 끊고 자결을 했으니 史記전단지에 忠臣不事二君이요 貞女不更二夫라 그게 조선인의 正統思想아닌가?
금일 동림석재공장서 孫사장이 비석을 다듬고 있어 비문을 읽어보니 정조때 김인순 현감이 撰한 연안李氏 효자 李명돈의 비석이라 본래 이 비석과 정려문이 가조 동례리 입구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폐문된 것을 宗孫 李종균씨가 그 사료를 찾아내어 재건립하매 忠孝思想이 허물어져가는 이때에 他에 귀감이 되노라. 현재 이런 효자,열녀,충신들 비석이 우리고장에 118개나 된다하니 살居자 번창할 昌자가 든 居昌이 仁.義.禮.智.信의 뿌리가 깊고 인심도 후한 산자수명한 고장임을 自他공인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