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올림픽 축구 문턱은 높았다

작성일: 2012-08-09

런던올림픽에서 영국을 꺾고 4강에 오르기 위한 피 마르는 혈전의 축구중계방송을 보고선 그간의 험난한 달성 과정의 한국 蹴球史를되 짚어본 계기가 됐다.
환언하여 축구의 기원을 알아보면 ㉮ 약5000년 전 중국의 곡예사들이 공을 가지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 ㉯ 이집트의 벽화에 축구와 비슷한 공놀이의 그림이 있고. ㉰ 중미지역 볼리비아 아마존지역의 원주민이 고무공을 손을 대질 않고 막대기 사이로 집어넣는 전통 놀이를 스페인 신부가 원주민의 풍속을 살피다가 축구의 기원을 알게 됐다는 설. ㉱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무덤 대리석판엔 공차기하는 모습인 “짧은 패스에, 앞으로 쭉 뻗는 공” 그림. ㉲ 황제 율리우스 시져는 양발 잡이였고 황제 네로는 한골도 넣지 못했다는 기록에서 축구의 기원을 그리스로 잡기도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인류발생과 축구가 거의 같다고 보는 것이다. 내 유년시절 돼지를 잡으면 돼지오줌보에다가 바람을 불어넣곤 차고 놀았기에, 수렵 시대 원시인들이 짐승의 오줌보를 가지고 놀이를 한 것이 축구의 기원이지 싶다.
그럼 현대축구의 기원을 알아보면 영국이 사카라는 현대축구의 규정을 만들었기에 축구의 종주국이 라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 기준을 정하기 전에도 럭비와 축구가 혼합된 스포츠가 있었다.
1846년 캠브리지 대학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스포츠 중 축구와 럭비를 불리 시킨, 학교의 규칙상 선수가 공을 든다든지, -상대편을 발로 찬다는 것을 금지한곤 -발끝은 공을 향해야만 하는 등의 규칙을 정했다.
1862년 JC 드링 이라는 사람이 선수의 수를 10명으로 정하자는 내규를 발표했다. 1863년 런던의 한 주점에서 12개 클럽이 런던협정을 맺고 캠브리지 대학의 규칙을 받아들인 그 후 6차례에 걸처 협정은 수정했었는데 이 내용을 정한 협회를 이라고 명명한다.
66년도엔 여기서 축구의 시간을 90분으로 정하는 법칙을 만들었고, 69년도엔 손으로 공을 만질 수없는 규칙과. 71년도엔 골키퍼만 손사용을 허용했다. 72년 주심이 등장. 80년 주심이 시간을 측정. 82년 드로잉을 손으로 던지게 했다. 90년 경기장을 석회로 라인마킹. 91년 주심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선수 퇴장의 권한 부여, 골문에 손에 잘 묻는 빨간 색칠. 97년 전 후반 연장 15분. 94년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7개국이 모여 국제기구로를 탄생시키면서 영국의 룰이 기준이 되었고, 점차로 규칙을 개량 변경시켜 전 세계가 동일한 규칙을 적용하게 되었다.
64년 전인 정부수립이전 IOC의 특별허가로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우리선수단은 서울에서 열차 배 비행기를 갈아타며 9개국을 전전 18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당시 대표선수 문지기였던 홍덕영 선수는 필자의 모교 한양대축구과목강사로 필자와는 사제지간이시다. 그래서 런던올림픽의 에피소드를 들어서 잘 알고 있던 터다. 여기서 스웨덴에 0:12의 수모를 당했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0:9, 터기에 0:7이란 소나기 골을 먹기도 했다. 1964년 스위스 월드컵 때는 부라질에 0:6, 아랍공화국에 0:10이란 기억하기조차 싫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패의 쓰라린 믿거름의 발판을 딛고 일어선 한국축구는 그동안 청소년, 월드컵, 올림픽경기에서 차례로 4강에 진입, 지금 런던대회선 우승을 바라보다가 3:0으로 실패 하여 강국 브라질의 문턱이 높음을 실감했다.
환언하여 태평양전쟁 후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방해해 남과 북을 갈라놓은 장본인’이 강대국 영국이었음을 상기할 때 그 원한이 사무치는 영국이 자국에서벌인 올림픽잔치판에서 축구종주국의 체면을 여지없이 짓밟아 뭉개버려 한을 풀어준 우리축구선수단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기쁘기 그지없다.
r200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