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글에 대한소고
작성일: 2012-10-11
20012년 10월 9일 제 566회 한글날을 맞아 한글날 공휴일제에 적극찬동 하면서 한글탄생과정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 본다. 까마득한 먼 옛날엔 자타간서로 의견교환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원거리 부족간 연락은 어찌 했을까가 궁금하다.
고분(古墳)등에서 나온 자료를 살펴본즉 맨 처음에는 그림에서 시작 점차 상형문자로 발전했음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중국의 창힐이 새의 발자국모양새를 보고 만들었다는 한자는 익히고 배우기 어려워 쉽게 의사전달을 못해 나온 것이 우리가 많이 듣던 신라시대 설총이 만들었다는 ‘이두문자’라는 것인데, 학자에 따라 설총이 차자 법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는 이견도 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엔 한문의 소리와 뜻을 빌려 우리말을 기록하던 차자(借字)표기법의 하나이다. <제왕운기>에서는 이서(吏書), <대명율직해>에서는 이도(吏道), <훈민정음>의 서문과 <세종실록>에는 이두(吏讀), <선조실록>에는 이도(吏刀),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찰(吏札), <전률통보>에서는 이문(吏文)이라 전하여지나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쓰임의 예로 무거을(無去乙→업거늘) 별위(別爲→별이, 특별한) 여량(餘良→남아) 무적(無赤→업스여, 없이) 등을 들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이후 당시엔 한문을 이두문과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조선시대 이두문은 주로 관청간에 주고받는 문서로 쓰였기에 이두와 한글을 쓰는 사회계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되면서 한문, 이두, 한글이공존하면서 선비들은 한문, 중인들은 이두, 부녀자나 서민들은 한글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어떤 글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계층간 신분을 쉽게 알아 볼 수도 있는가 하면 19세기말엔 국한문혼용체로 대체될 때까지 상용되어 온 것이다.
오늘날 일부에서 한글의 원형이라고 하는 가림토 문자는 경상도지방이나 일본등지에서 한글모양과 같은 문자가 발견되었고<한단고기>책에서도 가림토 문자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가 하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한글이 오래전부터 있던 문장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한글은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달에 세종대왕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자를 지으셨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세종 25년(훈민정음 창제당시 첫 발표문)
<한단고기>단군세기편을 보면, 제3대 가륵 단군 경자2년(기원전 281년)에 만든 정음 38자로 이루어진 가림토 문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 고 형상으로 말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加臨多)라 하였다.”
훈민정음이 이를테면 세종이 가림토 문자에서 암시를 받아 일부는 그대로 베껴 썼다고 한들 가림토 문자가 일반 백성들 까지 제대로 사용되었다면 굳이 새로 글자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여긴다. 어쨌거나 말과 글이 같은 소리글인 표음문자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지금은 영어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우리 한글이 그 자리를 차지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확신하면서 일제의 우리민족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말과 글이 송두리째 사라질 뻔 했던 아찔한 과거사를 상기하며, 정부는 한글창제의 날을 국경일로 재제정하길 다시 한 번 당부하노라,
IT 매체에서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독보적인 음성인식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한글이 과학적이고 그 발음이 체계적이라 문자와 음성을 자유자재로 호환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진일이다.
향후 21C글로벌시대를 맞이하여 한류열풍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요즈음‘강남스타일’을 보며 국력과 높아지는 국가브랜드 이미지와 ‘세계문자올림픽’ 한글 1위로 한글의 세계화정복도 머잖은 것 같아 가슴 설레고 벅차다.
임부륙_r200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