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음력 시월은 祭禮의 달

작성일: 2012-11-29

음력시월은 상달이라고 햇곡식 햇과일등 山海진미로 조상神께 祭禮를 갖는 달이라 全國방방곡곡 門中서는 제각,사당 묘지 등서 조상의 명복과 후손의 蔭德을 비는 祭禮차 바쁘다. 祭자의 뜻이 고기(肉)를 神께 바치곤 절하고 또(又)절하며 禮자란 神게 떡을(曲)쓸어 제기(豆)에 담아올린다는 뜻이라 논어에 祭神如神在라 제사를 지낼땐 神이 앞에 계신듯 禮하라하였고, 禮記엔 부모님 喪事시 孤哀子는 3년동안 喪禮를 치르며, 임금님 崩어시엔 節臣들은 3년服을 입으며 스승의 當喪시엔 3년간 心喪한다 했으니 세분이 다 저를위해 계셨고 君師父일체라 고로 冠.婚.喪.祭 중 으뜸이 祭禮라서다.
제사는 四代奉祭祀가 마땅하고 그 上位는 舊主埋安후 소문중 대문중서 제례를 갖는등 家家禮를 따른다. 祭需진설시 지방이나 사진 또는 感慕如在圖를 붙이곤 젯상을 차리는데 첫줄엔 棗.栗.柿.梨라 씨앗 수 따라 王을 뜻하는 대추와 3정승을 뜻하는 밤, 6조를 뜻하는 감, 8도 道伯을 뜻하는 배를 놓고 生동熟서, 左포右혜, 魚동肉서, 乾좌濕우, 右반左갱 한후 祭主가 향불을 피우곤 모사기에 술을 좀 붓곤 魂昇魄降 신령을 맞은 후 初헌관은 盃酒를 받아 향불위 3번 두른후 拱手하곤 再拜를 드릴제 祭官은 讀祝을 한다. 유세차 모년모일.... 어느듯 해가 바뀌어 00게서 가신날이 다시 돌아와 사모하는 마음 끝이 없어 오늘 여기 조촐한 음식과 햅쌀로 빚은 맑은 술을 올리오니 음향 하옵소서...
讀祝이 끝나면 아헌관 종헌관도 배주를 올리곤 삽시를 하면 조상神이 성찬을 잡숫는 동안 돌아서 있다가 철상을 하는데 참사자는 젯상음식을 飮福하며 조상의 官職 業績 등을 논하면 후손들은 우리가 勢道家門임을 자부하나니 금월 11월23일(음10.10)은 朝鮮八大 명당인 龜山祭가 경남居昌 월천면에 있어 1代서 10조位를 모시는데 全國서 많은 참배객들이 오시어 自古로 居昌愼氏가 문벌勢族임을 자랑하노라. 始祖 愼修공께서는 송나라 開封府人으로 서기1068년 고려 문종때 사신으로 오시곤 王의 권유로 귀화 고려때 參知政事로계시면서 中國행 國書를 검열하셨고 7세조 執平공께서는 신호위大將軍으로서 몽고병과 싸우다 작열히 전사하자 조정도 강화도로 옮겨가고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지자 8세조 검교공 愼成께선 配位 居昌劉氏 妻家곳으로 移居해와 이곳이 居昌愼氏 世居地가 되었다. 고로 龜山은 居昌愼氏 都先山으로서 10조위까지 봉안된 명당이라 멀리 北으로는 덕유산이, 南으로는 지리산이 龍飛鳳舞하고 東으로는 금귀봉이 西로는 아옵산이 左靑龍 右白虎하니 天下명당이 龜山이라 고로 자손들이 代代 세도를 누렸지만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곤 연산君이 등극하자 정승 愼승선은 사위가 王이되니 出處之義 예로 急流勇退하셨고 허나 연산왕이 폭군으로 광화도로 유배되었으니 愼妃역시 비운을 맞았다. 중종反正땐 忠臣不事二君론을 주창한 좌의정 愼수겸과 開京유수 愼수영 두兄弟는 박원종 일파들게 척살을 당하니 愼수겸의 따님이요 중종의 正妃 愼氏마져 폐위를 시키자 糟糠之妻不下堂이란 중종의 애원도 무위로 끝나 君弱臣强의 시대적 상황이 居昌愼氏를 몰락케했다. 금월11월24일(음10.11)은 朝鮮朝 한성부윤이요 호조판서를 지낸 12세愼인도 公의 제례라 아침 7시에 출발하여 함양군 안의면 봉산제에 당도하니 우리들 참배객이 제일 꼬랑이라 부끄러웠다.
그차중 불초소생이 제실밖 비석文을 읽고 섰는데 거창鄕校 儀典官 愼석봉씨께서 “거창회장 어디있냐”며 고함을 쳐 퍼떡 祠堂엘 입실하니 초헌관은 항렬이 높으신 宗孫이 맡곤 아헌은 前경남교육감이신 愼용래씨가, 종헌은 감히 重字항렬인 小子를 시켜서 본래 제례의식이 둔한 내라 더듬거리자 참사자 모두가 비웃으니 小人이 한수 가르쳐 주었다. 祭禮에 大家 공자님도 젯상 진설시 일일이 물어서 하니 옆에 향인들이 흉을 보자 子曰 “入鄕순속이라 알아도 묻는게 예의다”라 하신 명언을 남겨셨도다. 世祀후 背山을 둘러보니 몇백년된 도래솔이 울울창창하고 그속 古墳들 石碑들은 風마雨세로 글자가 마모되어 해독을 할 수 없어 There is nothing new and everlasting under the sun "태양아래 새것도 영원한것도 없다"는 聖句가 머리를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