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베품과 받음의 관계
작성일: 2012-12-14
태양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 즉 선악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볕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암막을 쳐 눈을 가린 그 사람은 빛을 받을 수가 없다. 공기도 또한 무한량이지만 숨으로 마신 공기를 토해내야만 무진장의 공기를 자기 것으로 되받을 수 있다. 이 원리는 단순히 햇빛이나 공기뿐만 아니라 모든 공급과 수급의 원리인 것이다.
공기는 무진장 있지만, 공기를 들이 키고 토 해내지 않는다면 다시 공기를 들이 마실 수가 없지 않은가. “풍요 속 빈곤”이라함은 쥐고 있는 부를 내려놓지 않으면 폐장 속에 있는 공기를 꽉 붙들고 숨을 내쉬지 않으려는 원리와 같다.
진실로 풍부한 ‘부’를 바란다면 ‘부’로부터 “자기의 것”을 내버려야 한다. 부는 인간이 행복하게 되기 위한 수단일 뿐 물질이나 금전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라고 하는 물질적 풍요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神에게 물질적 ‘부’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자기의 인격이 고상하게 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질적 ‘부’는 그림자 같아 영원한 것은 아니고 죽을 때도 가지고 갈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화된 영혼 그 자체는 가치가 증가함으로 어디든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원한 가치 있는 인격의 향상, 영혼의 승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쇠약한 육체의 건강을 회복코자 기도하지만, 덕을 쌓기 위해 인격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개인적 이익을 위함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해 힘쓰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 믿음이 먹혀 신이 내려주신 건강을 신이 원치 않을 목적에 써버리는 경우엔 기도의 공덕이 무용하고 심적 육체적 그 소모의 진행상태가 들어나는 법이다.
육체에 쾌 불쾌의 감각이 존재하는 이상 불쾌보다도 快를 구하고 고통보다도 樂을 구하는 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지만, 그렇다고 쾌락을 위해육체를 쓴다면 그 “생명력”은 목적을 위반하는 것이리라.
국제적 연관에 불경기나 국내 전체가 불황에 허덕일 지라도 신의 무한공급을 받는 자에게는 그 불황은 인생의 일장일이(一張一弛) 활시위를 죄었다 늦추었다함과 같이 보일 뿐임으로, 느슨해진 것은 뻗어날 준비를 하고 당황하지 않는 것은, 한가지의 일이 끝나면 새로운 일이 생기는 이치를 깨 닿는 그 신념을 통해 한층 좋은 일이 진실로 베풀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희망해도 그 반대의 상념을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한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희망은 의지의 구함이고 없는 것을 원하는 마음인데 베품과 받음의 상관관계에 있어, 인류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살펴 구하고 있는 것을 베푸는 것이 “사랑”이다. 인류가 즐거워할 것을 생각해내서 베푸는 그것이 사랑일진대 지금 거세(擧世) 인류를 “웃음”도가니로 만들어 美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후보에 오른 <싸이의 말춤>이 평화를 갈구하는 인류에 베풀고 받음의 관계서 한마당잔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