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왕조의 운명을 바꾼 역관

작성일: 2013-01-03

조선의 외교 사절단이 되면 문관인 정사(正使)는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으면 되지만, 역관은 유창한 외국어로 배후 절충의 임무였다. 때로는 뇌물이 한몫을 했고, 오랜 기간 맺어둔 인맥도 중요하였다. 인연을 통해 중국과 조선의 외교현안을 해결한 역관으로는 홍순언(洪純彦)이 유명하다.
홍순언은 소시적부터 기개충천 하였다. 역관으로 북경으로 가는 도중 청루여인들과도 짜릿한 인연을 맺었다. 자태가 고운 여인을 보고 마음속에 찜하여 주인에게 놀기를 청하였다. 역관이 여인의 소복단장그 사연을 묻자, “첩의 부모는 본래 절강 사람인데, 북경서 벼슬하다 불행히 염병에 걸려 모두가 돌아가셨습니다. 나그네 길이라 관(棺)이 여관집에 있지만 첩의 한 몸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낼 돈이 없음으로,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 라며 목메어 흐느꼈다.
가엽게 여겨서 장사지낼 비용을 물으니, “삼백 금이면 족하다.”하였다. 홍순언 역관은 곧 돈 자루를 풀어주곤 여인을 멀리했다. 여인이 함자를 묻는데도 입을 닫자, “대인께서 함자를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서 홍씨라는 성만 말해주곤 나왔다. 일행은 물정을 모르는 짓이라고 하여 모두 비웃었다.
그 여인은 후에 예부사랑 석성(石聖)의 후처가 되었다. 석성은 홍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사 우리나라 역관을 볼 적마다 홍역관의 동행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홍순언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공금횡령죄로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선 종계변무(宗系辨誣왕실 계보의 잘못) 때문에 열댓 명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왔지만, 明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임금이 노하여 “이것은 역관의 죄이다. 이번에 가서도 허락받지 못하고 귀국한다면, 수석역관 한사람을 반드시 목 베겠다.” 역관들은 감히 가기를 바라는 자가 없자, “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가망이 없다. 하니 그가 진 빚을 우리가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중국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논의 한바 그는 비록 죽는다 해도 한스러울 게 없겠지.” 모두가 홍순언 에게 그 뜻을 알리자, 기꺼이 허락했다.
선조 때 홍순언이 황정욱을 따라서 북경에 이르러 바라보니, 조양문 밖에 비단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었다.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선 홍판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예부 석사랑이 공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
계집종들에 에워싸인 부인이 장막을 헤치고 나왔다. 몹시 놀라는 홍순언 에게 석성이 말했다. “당신이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십니까? 부인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선비입니다.” 부인이 무릎을 꿇고 절하기에 홍순언이 굳이 사양하자, 석성이 “이것은 보은의 예배이니,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석성이 “조선사신이 온 까닭을 물었다. 홍순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석성이 주선하여 객관에 머무른 지 달 포만에 조선왕실이 청 한대로 허락되었는가 하면 39가지 야담과 소설로 전하는 홍순언 이야기는 『태조실록』과 『大明會典』에 기록되어 있다.
세밑에 애독자 제위께선 불우이웃을 살피어 복을 되돌려 받아 만사순리吉祥如意하시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