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
작성일: 2013-02-07
갈밭(노전)마을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 서럽구나
관아보고 울부짓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군인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일이나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하였네
시아버지 상복은 아직 그대로이고
갓난아기는 배냇물도 가시지 않았는데
삼대(三代)의 이름이 군적에 버젓이 올라 있다니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려해도 호랑이 문지기가 버티고 있고
이방이 호통 치며 집에 한 마리 남은 소마져 끌고 가버리네
갑자기 칼을 갈아 방에 뛰어 들어간 남편 그 자리에 피가 흥건하네
아이 낳은 죄라 한탄하며 스스로 행한 일이라니
잠실궁형(남자생식기를 자름)또한 지나친 형벌이고
위 詩는 1803년 가을 정양용이 강진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쓰인 詩다. 그 때 노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에 올라 있어 이정(里正: 현행 동리 이장에 해당)이 군포대신 소를 빼앗아가니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困厄)을 받는구나 하였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가 막아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시를 지었다는 참혹하고 슬픈 사연이다.
비유하면 중국 고사에도 폭정과 탐관오리는 끊이지 않았다. 양융연(楊隆演)이 남오(南吳)의 왕일 때 국정을 쥐고 흔들던 사람은 서온이었다. 이 무렵 끊임없는 전쟁으로, 경제는 쇠퇴일로였고, 백성들의 형편은 도탄지경에 처해있었다. 서온은 국정운영감각이 뛰어난 수양아들 서지고 에게 왕의 특명을 받아줘 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백성을 편안케 하기위해 훈령을 내려 이전까지의 빚은 모두 감해 주고 당년에 진 빚은 가을걷이 후에 갚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회적 모순을 크게 완화 백성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아 내었다.
서지고 는 낡은 조세제도의 폐단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자, 명망이 높은 송제구를 책사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나라엔 인두세가 있고 또 경작지세금이 있습니다. 세금을 바칠 형편이 못되고 세금을 이미 탕감하였지만 세금을 전혀 안 받을 수 없으니 이 문제를 어찌하면 좋으리까 하고 물으니. 송제구가 말했다. “세금이란 백성들 더러 돈을 바치라는 나라에서 만든 법인데,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걷는 폐단은 백성들에게 농경(農耕)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것이니,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인두세를 면제하고, 다른 세금에 대해선 양식과 천으로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가치가 1천전(錢)되는 비단 한필로 현금 3천전에 해당하는 세금을 바칠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부는 해마다 억 만전을 헤아리는 손실을 보게 됩니다.”란 반론이 제기됐다.
송제구는 대답했다. “정부는 예전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것 보다는 밑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부는 민간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모두 부유해졌는데 나라가 가난해졌다는 논리가 이치에 맞는 말입니까?” 서지고 는 그 말에 공감하여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새로운 부세방법 을 실행한 후 백성들은 신명을 다해 누에치기와 농사일을 다시 했다. 빛에 쫓기어 타관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황폐한 땅을 일구어, 버려진 토지가 개간 되었고, 나라는 점점 부강해 가기 시작했다는 고사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君舟臣水)는 고사가 있다.” 고대의 많은 명군들은 백성을 물에 비유하였다. 민심을 얻으면 능히 자기들의 江山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반대로 민심이 등을 돌리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기에 강산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
예나 지금이나 “민위방본(民爲邦本)”이것은 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기본으로 삼은 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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