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운주사 추리
작성일: 2013-02-27
전남 화순 운주사의 창건과 천불탑의 고증은 문헌상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신라말 고승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는 하나 연대는 미증유이다. 다만 중종 왕 때 편찬한 지리지 『신 동국여지승람』「능성현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데 좌우엔 석불과 석탑이 각각 천개씩 있으며, 석실에는 두 개의 불상이 등을 마주대고 있다”라는 기록만 현존 석불 탑의 유래를 짐작하게 된다. 그 뒤 현종 대에 편찬한 『동국여지지』에는 “운주사가 천불산 북쪽에 있는데 사찰은 오래전에 폐찰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 후기 『능읍지』에도 운주사가 오래전에 폐찰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으로는 운주사에 관련하여 운주사(雲舟寺)가 아니라 운주사(雲住寺)인 것으로 확인 되었다.
운주사의 특징은 천불과 천 탑이다. 경내에는 기존 탑파(塔婆) 조성과는 사뭇 표현이 다른 이형탑(異形塔)들이 무수히 많다. 여기저기 각양각색의 탑들이 산재 해 있다. 탑파의 장삼이나 가사자락도 특이하여 존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친근감이 든다. 여기저기 흩어져 바위 밑에 가지런히 모신 불상도 모습이 제각각이다.
이러한 탑파조성은 운주사의 내력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낳게 한다. 산사나 사당의 형태 가람의 배치구조, 머리는 역방향으로 뉘어 북극성을 바라보는 와불의 형태 칠성바위의 모습은 토속 신앙적으로 의아스러울 정도로 탈 불교적이며, 파격에 가까운 탑파조성의 분위기는 창건 유래에 대하여 궁금증을 낳게 한다. 단국대학교 불교미술을 전공하신 석좌교수 정영호박사님도 불가사의한 형태라고 하셨다. 소설가 황석영씨의 소설『장길산』엔 반체제 민중세력의 본부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오로지추정일 뿐 근거는 없다. 민중들은 와불이 일어나 앉는 날 민중의 세상이 올 것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기록은 사라지고 천불 천탑만이 남아 미스터리의 절로서장관을 연출하고 있지만 운주사는 민족사에 민담으로서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전해지고 있다.
도선국사와 관련된 창건 설화는 이러하다. 한반도의 형세가 行舟形局으로 동해안인 관동⦁영남지방은 산이 높아 무거운데 반해, 호서⦁호남지방은 평야가 많아 가볍기 때문에 동쪽으로 기울어져 나라가 편치 못하고 변란이 많다고 하였다. 산세를 감안해 볼 때 높은 탑을 많이 세워 돛대로 삼고 부처로써 짐을 많이 실어 놓으면 배가 균형을 잡을 것이며, 천불은 사공이 되어 항해 도중풍파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이 같은 도참사상에 의해 도선은 이곳에 절을 세워 나라의 안녕을 위해 使童하나를 데리고 와 寺止를 다듬고, 도력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그날 닭이 울기 전까지 흙과 돌을 뭉쳐 천불과 천탑을 만든 다음, 닭이 울면 천상으로 가도록 하였다. 석공들은 와불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 손놀림이 바빴을 게다. 이 때 꾀 많은 사동은 일에 지치자 그만 닭 우는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석공들은 와불을 다세우고 절에서 시오리 떨어진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하수락 일대의 돌들을 끌어 모아 놓고 일을 끝낼 참이었는데 닭소리가 나자 일손을 멈추고 창고바위에 도구를 넣고는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석공들이 천상으로 가버린 뒤에 살펴본즉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