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대로> 역사에 남긴 엿장수

작성일: 2013-05-09

황주백성 신착실은 엿장수다. 어느 날 모갑이가 외상으로 엿을 두 가래를 사먹곤 당최 갚질 않아 그해 말 착실은 모갑이의 집에 가서 엿 값을 달라고 재촉하다 시비가 붙어 손으로 모갑이를 떠다밀었다. 그때 마침 뒤에 있던 지게 가지가 공교롭게도 모갑의 항문에 꽃이어 복부까지 치밀고 나갔다. 모갑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엿값 두푼 때문에 살인을 했으니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중론 이었지만, 정약용은 극한 형이라 주장을 했고 이듬해 정조 왕께 아뢰어 정조의 동의를 얻어낸다. 정조 역시 살인할 의도가 없는 과실치사라 하여 신착실을 석방한다. 신착실은 아마도 역사의 기록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엿장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한 예외일 뿐. 누가 엿장수 따위를 사초에 남긴단 말인가. 야사에도 곧 문학작품이 있다. 화전가의 화전(花煎)은 꽃지짐이다. 여자들이모여 꽃지짐을 하던 중 한 청상과부가 신세타령을 하며 개가여부를 고민한다. 이에 ‘덴동어미’가 개가하지말고 수절하라고 하면서 고난에 찬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다.
‘덴동어미’는 네 번 결혼한 여자다. 남편 셋을 잃고 마지막으로 결혼한 남자가 바로 홀아비 엿장수 조 첨지다. 조 첨지와 살면서 잠시 행복하기도 했다. 아들을 낳았고 부부는 어리장, 고리장 사랑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 행복은 정말 잠시였다. (별신굿)에 팔엿을 고다가 불이나서 조 첨지는 죽고 아이는 불에 데어 병신이 된다. ‘된동어미’란 이름은 불에 덴 아이의 어미이기 때문에 얻는 이름이다. ‘덴동어미’는 이후 덴동이를 데리고 홀로 산다. 불상한 조 첨지는 어떻게 엿장수를 했던가를.
이야기는 그날부터 양주(兩主: 부부)되어 영감 할미 살림한다. 나는 집에서 살림살고 영감은 다니며 엿 장사라. 호두약엿 잣박산에 참깨 박산 콩박산에 산사과 질빈사과를 갖추갖추하여 주면 상자고리에 담아 지고 장마다 다니며 매매한다. 의성장, 안동장, 풍산장과 노루골 내성장, 풍기장에서 한달 육장 매장보니 엿장수 조 첨지 별호되네.
아내는 엿을 갖추갖추 만들고 사내는 그 엿을 지고 다미면서 경상도 안동 일대의 오릴 십일 장판 여섯 곳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것이다. 이 부분이 아마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 (丁若鏞)이 흠흠신서(欽欽新書)에 남긴 엿장수에 대하여 남아있는 가장 구체적인 기록일 것 같다.
“곪은 달걀이 병아리 될까?” “ 한번 깨진 접시 붙여질 수 있을까”
“깨진 바가지 꿰매어도 물이 새기는 매한가지” “십년 과수(寡守)얻은 서방이 하필 고자란다.”란 속담이 있다. 엿장수 아내 ‘덴동어미’가 네 번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본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시쳇말로 기구한 사주팔자 노숙자로 치세요. 로또 복권 당첨되듯 고쳐질 리 만무한 법! ‘덴동어미’는 잘 아는지라 수절을 권유하는 애절한 사연이다. 이래서 천지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은 마치 북에 북채 가 있어 ‘적’(擿북의 둘레)과 ‘당’(擋북의 한 가운데)이라는 적당소리를 내며 치는 것과 같은 삶을 一言人生死라 하는 갚소.

<임부륙 r200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