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아절현(伯牙絶絃)

작성일: 2013-06-05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 명인이 있었다. 백아는 높은 산을 연상하면서 거문고를 타면 친구인 종자기(鍾子期)가 그 곡을 알아듣고는 “거문고 소리가 웅장한태산과 같다”라며 칭찬을 했었다한다. 백아가 큰 강을 생각하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양자강과 황하가 흘러넘치고 있구먼,”하며 감탄을 했었다한다.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고 친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종자기가 세상을 떠났는데 백아는 “내 거문고의 음색을 알아줄 사람이 이제 없다”며 거문고 줄을 끊고는 두 번 다시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열자(列子) 탕문편》. 이를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 하여 자신을 알아주던 친우를 잃은 슬픔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상대를 잘 알아야 하고 위해주는 귀를 열어 둘 때만이 진정한 벗을 사귈 수 있을 것이다.
국원성(國原城)은 지금의 충주부근으로 그곳에 살던 백결선생(百結先生)이 정초에가난한 아내가 떡방아 소리를 듣고 탄식하자 금(琴거문고)를 타서 떡방아 공이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 했다는 초등학교 때 배운 이야기가 기억에 새롭다.
“가야국 우륵(于勒)은 가야금의 명인으로 전통음악인 국악의 기틀을 닦은 사람이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기악뿐 아니라 창(唱)과 무(舞)에도 두루 능하여 스스로 악곡을 짓고 연주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냄으로써 정신적인 신라 대악(大樂)을 완성한 악인이다.”
악성우륵은 본시 대가야국 가소가야 사람으로 밝혀짐에 따라 악성우륵의 탄생지가 제천군 청풍면이나 충주 탄금대부근이 아니라 거창 가조면 미녀 봉 기슭 석강리 ‘소새’ 마을 이라는 한글학회장 김종택 박사『우륵고향 ‘성열(省熱)’은 어디인가?』란 논문학설을 비정(比定) 찬동하면서 악성 우륵이 지방자치단체들의 축제노름 등 지역 이권 다툼에 오르내림이 불쾌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굳혀져야겠다는 바람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우륵의 예술혼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제1회『거창예술, 우륵을 만나다』행사 주체인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에 축하의 말을 전하는 바이다.
김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부터 26,7년 전 전 대구 MBC TV 취재팀팀장이 지역문화 발굴 목적으로 경남 거창군 가조면 대초리(大楚里)에 온 일이 있다고 한다. 그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마을기로(耆老 연로하고 덕이 높은 사람) 김희석(金熙錫)옹이 TV 카메라 앞에서 건너편 석강리(石岡里) 등성이를 가리키면서 ‘저기가 우륵이 태어난 곳’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너무도 뜻밖이라 놀라면서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릴 때부터 들었고 실제로 그 곳에 우륵이 살았던 ‘우륵 터’가 있다고 했단다. 너무도 황당하고 확인할 길도 없어 잊어버린 채 30년을 살아왔는데, 우연한 기회에 가야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학자들이 쓴 가야사 관계논문과 저서들을 읽게 된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야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륵의 행적이 중요한데, 그 출신지 ‘성열(省熱) 고을이 구체적인 논증 과정을 거친 적도 없이 ’신이(新尒)‘현, 곧 경남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로 비정되어 기정사실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추측일 뿐, 우륵의 고향 ’성열(省熱)은 경남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소새’마을임이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임부륙 r2005@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