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솔거
작성일: 2013-09-12
신라 人으로 농군의 아들이다. 소 시절부터 나무를 할 때는 칡뿌리로 바위에 그림을 그렸고 밭을 맬 때도 호미 끝으로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다 한다.
그는 시골에서 자랐기에 스승이 없어 화술을 받을 길이 없어 주야로 천신(天神)게 기원(祈願)하여 신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였다. 하루는 어떤 노인이 꿈에 나타나시어 말하기를 나는 (신인神人)단군 (檀君)이시다. 네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신필(神筆)을 주노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나자 꿈에서 본 일이 환해서 하루아침에 이름난 화가가 되었다.
솔거는 신의 은혜에 감명하여 단군의 화상(畵像)을 그린 것이 거의 천장에 가까웠으니 모두 꿈에서 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었다. 고려사람 이규보(李奎報)가 솔거가 그린 단군화상에 찬(贊:서화에 쓰는 시문)을 쓰기를 영외의 집집마다 모시고 있는 단군의 화상은 그때 솔거의 솜씨에서 나온 그림이라 했다. (동사유고)
고사엔 절의 승려가 단청을 다시 고쳐 칠한 다음부터는 새들이 다시 오지 않았다. 경주분황사의 관음보살상과 진주단속사의 유마상이 솔거가 그린 것이니 세상에서는 이것들을 “신화”라고 부른다. (삼국사기 열전)
그림이 공예의 일부분일 진대 예전에 수용과 정착에 내제된 개념의 변모는 공예의 근대적 인식과 구조 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공예라는 말 대신 금공, 목공 등 분야별로 지칭하는 기술 중심의 용어가 일반적이었다. 전 분야를 통 털어서 말할 때 한자어로는 백공(百工)또는 백공기예라 했으며, 이런 관행의 흔적은 1898년 황성신문 에서도 볼 수가 있다.
15세기 능엄경언해(愣嚴經諺解)이후 부터는 “성녕”이라는 말을 공예활동의 통칭으로서 쓰다가 공예가를 공장(工匠) 장인(匠人) 또는 공(工)〜장(匠)이 일반적이 되었지만, 특정한 직능을 어간 삼아 일의 수행체의 의미로 “바치” “와치” “아치”를 붙여 분야를 나누었다. 예를 들어 소학언해에서는 옥공예를 “玉바치”라하고,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 초간본 “궁장”(弓匠)을 “활와치”라 칭하였다. 1601년에 간행된 「석봉천자문」에 工(공)을 “바치” “공”이라 풀이하였으니 바치가 한자어 工과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예”라는 용어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881년(고종18년)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이헌영이 쓴 견문록 「일사집략」에 ‘나카다 다케오’ 라는 일본관리가, 우리 측에 보낸 서신에 나타난다. 이 글에서 그는 “서양”이 하는 일은 자못 많다. 이제 그 중의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이기주의나 위핍주의(威逼主義)는 몹시 미운 것 이지만 의술, 구리, 공예, 문학, 군사 법률들은 매우 칭찬할만하다 했다.
당시 한국은 개화기로서 청나라 일본 등과 교류를 시작하였지만 조선정부의 외교문서엔 공예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예컨대 공예가 쇠퇴하게 된 동기는 양반상놈이란 상반제도와 사농공상(士農工商)순으로 글 읽고, 먹고사는 일에 우선하여 상공인을 천시한 국가적 제도의 폐단 탓에 솔거와 같은 신인이 사라진 것 같아 통탄을 금할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