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와유강산(臥遊江山)
작성일: 2013-10-04
송나라의 종병이라는 사람이 늙고 병들면 명산을 두루 살피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하곤 노년엔 누어서 보기위해 주유했던 명산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 두었다한다. 마치 금강산의 비로봉 같은 일만이천봉을 병풍이나 부채처럼 펼쳐 그린 걸개나 화첩(畵帖)말일게다.
한데 금강산의 이름 중 개골(皆骨 뼈뿐인)산 이나, 상악(霜嶽 서리가 내린 듯이 하얗게 보이는)산, 풍악(楓嶽 단풍이 우거진)산은 산의 모습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산이름들은 금강산보다 먼저 세간에 널리 인구회자 되고 있었다. 금강산이란 명칭은 고려시대 말 13세기 경부에서 불리기 시작했다한다.
금강산은 본래 불교의 경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불교적인 신앙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불교는 고려시대 국교로서 중시되었고 당시의 불교신자들은 화엄경과 법화경을 즐겨 읽으며 신앙심을 키웠다. 그런데 이 경전들 가운데 “보살들이 살고 있는 해동(海東)의 금강산”이란 기록이 실려 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차츰 해동 곧 우리나라의 동해 부근에 위치한 기암절벽이 지천으로 늘어선 신비한 산을 해동금강산이란 연유에서다.
금강산(金剛山)의 이름 중 가장 늦게 등장한 이름이 봉래산(蓬萊山)이다.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 중의 하나로 알려진 봉래산은 금강산의 산세가 수려하고 신비해 붙여진 것으로, 허나 금강산의 이름이 정해진 과정에서 눈여겨 볼 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금강산이란 이름을 배척했다는 사실이다. 유학에 심취한 선비들은 금강산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라 하여 부르기를 꺼려해서란다. 대신 금강산의 경관이나 특성과 관련된 이름인 풍악산이니 개골산이란 이름을 선호하였단다.
현존하는 그림들은 해산첩(海山帖), 풍악권(楓嶽卷), 해악도(海嶽圖)라는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이란 이름을 피하려고 한 선비들의 유학적 가치관 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금강산이란 山이름이 도참풍수설에 의해 나빴던, 유학자들이 불경에 실려 있단 탓에 싫든 좋든 간에 굳이 상관할 바 아니나, 작금 북한에선 금강산회담이 잘 먹혀들지 앉자 납북대화의 탁상을 뒤 짚곤, 정치적 이유를 빌미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함에 따라 남북관계가 돌연 경색국면으로 접어들었다니 불경스럽도다.
북한이 3년만의 이산가족상봉 행사 개최를 불과 4일 앞두고 돌연 연기한 태도변화는 우선 금강산 관광재개에 불만도 컸겠지만, 전례로 비춰볼 때 ‘밥 한 끼 값으로 100달러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시피, 국내외 정세론 북한의 붕괴를 노골적으로 우려하고 있는 만큼 제정신이 아닐 터, 상봉가족의 새옷 한벌 값도 치를 형편이 안 된 다고 치자. 미적거릴 수밖에, 여지것 해온 것 처럼 퍼주기 뒷돈거래 없이는 성사가 불가하다면 필자의 속 좁은 기우일까, 오산일까, 망령 탓으로 돌려야 할까… 가소롭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