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옛.국제외교관
작성일: 2013-10-17
당나라가 망한 640년경 고창국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이가 고구려의 명장 고선지다. 고창국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 이란계가 차사(車師)라는 왕국을 세우곤 교하(交河)에 수도를 두었다. 허나700년이나 지속된 차사왕국이 450년 북향의 공격으로 망하고 만다.
고창국이 고선지의 공격으로 당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게 해 고창에 서주을 설치했다. 칭기스칸의 등장으로 다시 원나라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훗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 지금의 지명인 트루판 으로 불리게 된다. 자치국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던 화적합이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전사하고 고창성이 파괴되었던 해가 1275년이다.
여기서 말 하고자하는 첫 번째 인물이 설장수(偰長壽 134-1399)의 뿌리격인 고창이다. 기록에 의하면 설장수의 아버지 설손(偰孫)의 고조할아버지가 원 나라에 기화 했다는 고창국이 망하던 1275년을 전후해 설시집안은 자발적으로 원나라에 의탁한 것 같다.
설손은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 이미 원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고려의 공민왕과 친분을 쌓았던 것을 계기로 1358년(공민왕 7)황건적의 난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고려에 귀화했다. 공민왕은 그를 고창백(高昌伯)에 봉하고 다시 부원후(富原侯)에 책봉해 부원에 토지를 하사하는 등 크게 우대했다. 이미 설손은 원나라 순제 때 당본당 정자로 황태자에게 경전을 강론할 만큼 학문과 문장의 명성이 높았다. 그 때 설장수의 나이는 17였다. 위구르 출신에 아버지가 원나라 문신이었다는 사실을 견주어 볼 때 설장수도 위구르 말에다 중국어와 몽골어에도 능통했을 것을 추정해 보면 고려의 문신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4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감각의 文才까지 갖췄던 그는 1362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고속승진을 거듭하면서 주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 별도의 통역이 필요 없는 외교관이라 조정의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왕 13년 설장수는 문화부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의 관복을 답습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는 외교적 성과를 올려 한국 복식(服飾)사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명 태조가 철령 이북 땅은 원래 원나라에 속한 땅이기에 귀속하겠다는 심사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병참 군영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고려조정에서 외교적 정보를 알아낸 인물이 설장수다. 철령위문제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끝나게 되는 요동정벌을 고려조정에 확산시킨 결정적인 사건이다.
창왕을 몰아내자는 흥국사(興國寺)회의가 이성계의 요청으로 열리는데 9명의 구성원중 정몽주 설장수가 포함 가짜왕조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창건론 자들게 비협조적인 정몽주와 함께 후자에 가까웠기에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역모로 귀양을 간다. 정도전이 국내 형격이라면 설장수는 국제 형격이라 하겠다. 실록은 정적 정도전이 역적 설장수 등을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즉위교서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정도전이 설장수 등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에 대해 실록은 사감(私感)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권력투쟁의 일환이다. 흥국사 역모에서 보듯 관직은 정도전이 설장수 보다 아래였다.
태조는 5개월쯤 지난 후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의 유배를 풀어 주었는가 하면, 설장수를 검교 문하시중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시켰다. 작금 박대통령은 국제 외교 시 통역 없이 회담하는 것이 돋보인다. 굳이 반기문 UN사무총장을 꼽지 않더라도 예나 지금이 국가에서 외교관을 우대 시 함을 왠지 알 것 같아 고사를 들먹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