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라에 부활한 석가모니가문
작성일: 2013-11-28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란 책에서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이었고 왕비는 ‘마야부인’이었는데, 이는 각각 석가모니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진평왕의 동생인 ‘백반’과 ‘국반’역시 석가모니 삼촌들의 이름을 차용했다. 마치 인도의 석가모니 가문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부활한 느낌을 준다. ‘선덕(善德)’이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忉利天)을 주관하는 천자의 이름이고, 석가모니에 의해서 훗날 전륜성왕(前輪聖王)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진흥왕(24대) ․ 진지왕(25대) ․ 진덕왕(28대)과 같이 여러 왕들이 연이어 왕호에 진(眞)자를 사용했다. 왕호에 ‘진’자를 붙인 이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참된 종족(眞種)’ 즉 ‘석가모니 종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라의 자장법사가 중국의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너희국왕(선덕여왕)은 인도 찰리종(석가모니왕족)의 왕이므로 다른 족속과는 다르다”고 했다는 선덕여왕가문의 특별함을 잘 보여준다.
신라왕실이 석가모니와 같은 종족이라고 표현한 것은 스스로를 보다 신성하고 선택된 족속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차별적인 우월감을 부각 시키고 있다. 진평왕의 딸로서 신라에 부활한 석가모니 가문의 완결점에 위치했던 선덕여왕은 이러한 ‘신성한 종족’, 즉 ‘성골’이라는 신분을 배경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선덕여왕이 성골을 내세워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수백 년 동안 이어온 남성중심의 문화는 여왕의 권위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선덕여왕 대에 고구려 백제가 신라를 집중공격 했던 이유는 신라 국왕이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24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위축되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여 신라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때가 공교롭게도 선덕여왕 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통치에 비판적인 기득권 층 세력은 신라가 위기에 처한 이유를 모두 여왕 탓으로 돌렸다.
선덕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은 겨울철에 개구리 떼가 영묘사의 옥문지라는 연못 부근에서 사나흘 계속 울어대는 이상한일이 벌어졌다. 이에 여왕은 장수를 불러 “그대들은 지금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을 찾으시오. 적군이 그곳에 숨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 죽이시오”라고 명했다. 왕의 말대로 백제군이 매복해 있었다. 백제군을 급습하여 전멸시키고, 뒤따른 후속부대까지 전멸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가 자초지종을 묻자 개구리의 성난 모습이 병사와 같았기 때문에 군사적 변고가 발생했음을 예측했고, 옥문(玉門)의 뜻은 ‘여근’과 같은데 색으로 따지면 백색이고 방위로 따지면 서쪽을 뜻하기 때문에 서쪽지역에 여근곡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선덕여왕은 평소 건강할 적에 자신이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낭산 남쪽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했다. 과연 예언한 날에 여왕이 죽자 그곳에 장사지냈다. 훗날 30대 문무왕이 선덕여왕 릉 밑에다 四天王寺를 지었다. 그런데 불교에서 도리천은 실제로 사천왕천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선덕여왕의 예지력과 영험함이 사실로 드러남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지금 천주교 사제단 등 일부종교단체에선 박근혜대통령 흠집 내기에 바쁘지만, 선덕여왕이나 전 영국대처수상 버금가는 샤프한 두뇌전략으로 국정을 무난히 이끌어 갈 것이라 여긴다.
<임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