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頭山天池
작성일: 2014-02-13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대동지지(大東地志), 팔도총도(八道總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의 우리나라 고지도에선 백두산 천지(天池)란 이름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용왕담(龍王潭), 용담(龍潭), 대지(大池), 대담(大潭)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음을 보곤 사가일각에선 이를 두곤 과거 우리나라에선 大國인 중국의 영향력 때문에 임금의 칭호도 황(皇), 재(宰), 천(天)등과 같은 글자를 사용 할 수 없어 天池란 말조차 쓰지 못하고 용담이나 대지 등으로 부른 시대적 아픔의 배경이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러다가 근세 들어와서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의 국운이 급격히 기울자 비로소 천지라는 이름이 도상과 문헌에 오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최서연 국제연구원장에 의하면 천지란 명칭이 처음사용된 것은 조선과의 국경담판에 참여한 청나라의 문인 유건봉이 1908년 백두산의 여러 봉우리에 중국식 이름을 붙일 때 용담을 “천지”라고 명명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실제로 유건봉은(장백산 강강지략)이라는 보고서에서 자신을 ‘천지유사(天池?史)라고 적었다한다.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는 조선과 청의 국경을 표시하기위해 1712년 숙종38년 5월 청의 제의로 백두산에 세운 비를 말 한다… 우리나라 백두산을 시조인 단군이 탄생한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하고 있기에 만주지방에서 성장한 청 또한 백두산을 태조 누루하치 가 탄생한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하였다.
당시 조선과 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으나 백두산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고 특히 두만강 상류의 북안(北岸)지역은 일종의 완충지대 이었다.
백두산지역에 큰 관심을 가졌던 중국에 김일성은 중공군의 6. 25참전 대가로 백두산을 반 토막 내어 잘라서주었다는 사실은 북한 당국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한국사가들도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져 있어 필자로서도 심히 유감인바 소담을 필하노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였는가 하면, 한민족의 상징인 백두산을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영토로 공인 받으려는 창바이 공정(백두산 공정 프로젝트)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인즉 백두산을 중국의 땅으로 만들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 제6회 동계아시안게임의 성화를 백두산 천지에서 채화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2018년 동계올림픽을 백두산에서 유치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또한 백두산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가 한국과 북한 등 관련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자, 먼저 세계지질공원(World geopark)에 등재하여 향후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유리한 명분으로 삼으려하고 있다.
재미 사학자 이홍범 박사가 역사 알리기에서 말하길 “역사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라고 했다” 앞으로 국가차원에서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국제사회에 우리의 입장을 꾸준히 알리고, 백두산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늘려 나갈 방안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