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쟁(黨爭)
작성일: 2014-04-02
[칼럼] 임부륙
당쟁은 선조8년경 동서 분당에서 시작되어 조선 말기까지 국사와 민생은 제처 두곤 당리당사 사리사욕을 위하여 피터지게 싸워 나라를 망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명종 代의 일로써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전랑(吏曹銓郞)에 뽑혀, 이는 조정의 백관을 고선하는 권리를 쥔 중책이었다.
그런데 명종妃의 오라버니 심의겸(沈義謙)이 이에 대하여 반대를 주장하니. 이유인즉 심의겸이 이전 어느 날 당대의 재상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을 때 김효원이 그 집 문객이었음을 트집 잡았다.
김효원은 깨끗한 선비의 신분을 지키지 않고 청년선비로써 재상가의 문객 노릇은 비루한 일이라, 이런 자를 전형관을 시키면 벼슬이 공평치 못하리란 점을 들어 반대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김효원은 심의겸을 매우 마음속으로 밉게 본 척이진 관계였다.
이로부터 얼마 뒤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전랑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매 이것을 본 효원이 가만 둘 까닭이 없었다. 충겸은 士林에 아무명망도 없는 사람을 단지 궁중의 측권을 자세삼아 이런 벼슬에 뽑힘은 가당치 않다고 효원이 들고 일어섰다.
이리하여 심씨는 김씨를 가리켜 이전 원한을 이런 곳에 풀려는 소인이라 일컫고, 김씨 측은 심씨를 가리켜 뒷힘을 입는 비루한 사람이라고 서로 시비가 왈가왈부하였다. 이 시비가 차차 벌어져 단지 심씨 김씨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심씨편 김씨편을 돕는 패거리 잔당들이 생겨서 두 패가 격서서(참 맞서서)시비를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즉 벼슬아치 집안과 문중 사림의 대립이 선조代에 이르러선 더욱 커졌다.
당시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파 저 파로 붙어서 서로 시시비비하기 시작했다. 이발(李潑), 류성룡(柳成龍)등이 김씨 東村에 살았음으로 김씨는 東人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심씨파는 윤두수(尹斗壽), 박순(朴淳), 정철(鄭澈)등이 심씨의 파가 되어, 서촌에 살았기에 西人이라 불렸다. 이처럼 서로 격서서 군자라 소인이라 하는 시비가 생겨나니 동인과 서인의 틈이 차차 벌어져 커 갔고, 조선을 잡아먹는 큰 불집이 되는 사색당파(四色黨派)을 낳게 되었다.
당파라는 색안경을 쓰고선 반대파의 사소한 일까지 是是非非 를 가리는 붕당 정치를 본격화 하게 됨에 따라 조선은 망조(亡兆)의 길로 들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에선 심각한 문제가 당쟁이라 하겠는데, 鳥頭 골빈 당 들이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원래 지식이란 임기응변의 방편이고, 세상만사의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오로지 학문에 의해서만 가능한 법인 것을!
톨스토이의 대작 <안나카레리나>에 재산은 똥과 오줌과 같다고 했다. 그것이 쌓였을 때는 악취가 풍기지만, 뿌려졌을 때는 흙을 기름지게 한다고도 했다.
중국 송代 도연명의 詩
청춘은 가면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없네
때 맞혀 열심히 해야 하거늘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歲月不侍人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