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릿고개
작성일: 2014-05-29
가을에 거둔 양식은 동지섣달 긴긴밤에 바닥이 다 나고 햇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오뉴월 양식이 모자라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참던 보릿고개를 춘궁기라 한다. 구황은 흉년 따위로 기근이 들었을 때 배고픈 이들을 구제함이고, 기근은 식량이 모자라서 조석을 끓이지 못함을 일컬음이다.
기근해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상수리과 나무 열매로 떡갈나무, 갈참나무, 물참나무열매가 도토리이다.
그 다음이 송구라고 봄에 물오른 소나무 속껍질이 구황이나 기근을 막는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소나무는 나라에서 엄격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쉽게 벗겨다 먹을 수가 없었다.
세종 16년에 진제 경차관이 구황대책으로 야산의 뒤틀린 소나무에 한해 껍질을 벗겨먹을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세종18년 영동현감 박순의 상소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농사시기를 놓쳐 원전(元田)이 2591결이었으나 수확한 것은 97결 뿐 이라,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다.
이러한 현상이 특정 왕조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기근때 마다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세조3년 7월에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 몇 년 동안 기근이 계속 이어졌었다. 특히 영남지방에 기근이 심해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굶주려 죽을 판이었다. 미음과 죽을 잇대어 연명을 할 수 있는 자가 백에 한 두 집사람에 불과 했었다니 말이다.
그러기에 나무열매를 줍고 소나무껍질을 벗겨서 조석 끼니로 삼아 목숨을 부지 했다. 나라에선 기근이 계속되자 소나무 벌목을 금지한 규정을 풀어 껍질을 벗겨 먹도록 했다. 이는 곧 소나무의 금령 해이를 불러왔다. 이에 따라 조정에선 소나무의 금령을 더욱 밝히고 여러 포구의 만호로 하여금 놀고 있는 빈 땅에다 소나무를 심도록 하고 처치사로 하여금 단속하게 했다.
기근에 소나무껍질로 연명한 사례는 성종 1년(1470년) 에는 하삼도의 한재(旱災)가 매우 심해 오뉴월 보리를 전혀 거두지 못하게 되자 곳곳에서 송구껍질을 벗겨서 목숨을 부지 했었다 하니 이에 성종은 소나무 베는 것을 허락하여 그 껍질로 구황할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소나무가 벌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상으로 어린 소나무마저 베어져 병선(兵船)용 목재를 수급하는데 큰 지장을 초래 했으리라는 점이다.
속담에 “나락이삭 끝을 보고는 죽어도 보리이삭 끝을 보고는 죽지 않는 다.” 란 말은, 벼는 이삭이 핀 후에 40일이 되어야 먹을 수 있지마는, 보리는 이삭이 핀 후에 20일만 되어도 보리죽이나, 찐 보리밥을 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가난으로 굶주리는 사람도 보리에 이삭만 나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기막힌 말이다.
북상면 사무소 처마 밑 뜨락엔 필자의 증조부 성균진사(成均進士) 오당 임수양(塢堂 林秀養 一名貞熙)의 시혜비가 서있다.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경오년(庚午年)에 한발이 들어 오랜 가뭄 끝에 흉년기근에 아사 직전의 洞里民들을 구휼한 그 고마움을 기리는 수혜자(受惠者)들이 감사한 마음을 길이길이 간직하고 후세에 귀감이 될 기념비를 세웠다.
피죽도 못 얻어먹든 보릿고개엔, 고 박정희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욱일승천기’를 앞세워 독립군을 토벌한 일제 괴뢰정부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 중위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했다. 용서받지 못할 반민족행위자이지만, 5. 16군사혁명 후 새마을 사업에 성공 춘궁기 보릿고개를 타파 국민식생활개선과 기아선상에서 구출한 공로의 치적을 인정 공과(功過)를 상쇄해선 “퉁퉁” 처 주자는 것이 대체적인 국민정서인 것 같다. 어쨌거나 하늘이 내린 천추만대 歷史에 길이 남을 의인(擬人)임에랴!
-붓가는대로 임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