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수집가 안평대군
작성일: 2014-06-12
조선국왕 세종임금의 셋째아들 이용은 세종27년 28세의 안평대군으로써 10여 년간 수집해온 서화 소장품을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이를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죽주는 명을 받들어 안평대군의 방대한 소장품을 기록한 <화기>를 남겼는데, 이때 그가 안평대군과 나눈 대화록이 전해지고 있다.
〜아 자연의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그것이 자연의 물건이건 인위적인 것이건, 글씨건 나는 천성이 미적아름다움을 보면 참을 수가 없구려, 이것도 병이런가? 끝까지 찾아내서 내 수중에 간직하지 못하면 애석한 마음에 참고 견디기가 어렵구려! 내가 이러한 서화와 골동품 을 수집하고자 하는 뜻을 둔지 어언 10년이 지나 오늘날 이만큼 수집케 되었다네. 아, 아 ! 물(物)이란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때가 있고, 모이고 흐트러지는 것이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 옛날에 한창여(韓昌黎 당나라 문인 한유 韓愈)가 독고생(獨孤生) 당나라의 문인 신숙(申叔)의 그림에 화제(畵題)를 쓰고 감상했던 것 같이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으라.
당나라 시인 장돈간(張敦簡)이 이를 위해 記를 지었다. 하니 하물며 비해당의 소장품은 고금을 두고 정선하여 수백 축에 이르니 기를 지어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신숙주<보한재집>권14화기
안평대군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조선최대의 개인 수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엄청난 수장품은 예술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부(富)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화기>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동진(東晋) 당, 송, 원, 조선, 일본에서 35명의서화가 작품 222점을 수집했다. 고재지(顧愷之) 당나라의 오도자(嗚道子) 왕유(王維) 송나라의 소동파와 곽희(郭熙) 원나라의 선우추(鮮于樞) 조맹부 등 역대 유명한 중국 대가들의 작품이 두루 혼합되어 있다. 유일한 조선인 안견이 있는데 그의 작품만 무려 30점에 달한다. 동진 고개지는 이미 안평대군시대의 기준으로 1천 년 전의 사람으로 그의 작품을 만나기는, 당시의 중국에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하며, 곽희400년 전, 조맹부 100년 전 사람으로 작품 중에 모사품이 있는지는 별개문제로써, 가히 소장품은 그 가치가 세계적 보물이었음을 내비치고 있다.
고려25대 충열왕부터 31대 공민왕까지 100여년 동안 고려의 왕은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공주들이 시집올 때 많은 서화 등 원나라 황실로부터 물려받은 보물을 배에 가득 실어와 충선왕은 이삿짐수레가 무려 142대에 달했다는(고려사 절요) 기록도 있다.
필자는 소시 적 우연찮게 온양 민속박물관을 들려본 적이 있다. 그땐 규모가 빈약하여, 그 정도 수준이라면 나도 가능하겠다는 포부로 골동품을 수집하나 잘 간수치 못해 도둑놈들 좋은 일만 시킨 꼴이 됐었다. 이 지역 여러 곳을 다녀보면 간혹 눈에 익은 내 물건이 들어나 보이지만, 난 못 본 척 잘 들 간수하길 바랄 뿐 내색하질 않을뿐더러 아깝지만 되찾기를 그만 두기까지는 세월이 약이었을 뿐이다.
간곡한 바람이 있다면《진품명품》TV프로에서 고가인 골동품값을 알려줌으로써 반대로 값싼 민예품을 경시해선 내어다버리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 할 수 있다. 고로 귀중한 민속자료가 사라짐에 따른 매우 애석한 심정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정부문화재청, 방송매체에선 그 폐해의 심각성을 감안하여 프로그램 편성을 개선 변경할 여지가 다분히 있기에, 조정자재 해 주길 국가만년대개를 위하여 간절하게 요구 하는 바이다.
매사 눈은 밝게 보는 것이 중요하고, 귀는 밝게 듣는 것이 중요하고, 마음은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지 못함이 없다. 세상 사람들의 귀로 들으면 듣지 못함이 없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면 알지 못함이 없다. 수레의 바퀴통같이 각 방면의 힘을 모아 함께 나아가면 밝음이 가려지지 않을 것이라 했거늘…
-붓가는대로 임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