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관심병사라니!

작성일: 2014-07-10

우리속담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영국속담엔 성현군자라도 火를 돋구면 짐승으로 변한다고 passion makes man a beast라는 말이 있다. 지난 유월 21일 강원도 철책선 GOP근무 임병장이 평소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다 누적된 감정이 폭발 동료들께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 병사 5명이 즉사하고 9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을 두고“관심병사,요주의 인물”에 대한 관리가 허술했고 우리들“엽전군대” 병영생활이 얼마나 비리한가를 경고한 사건이다. 필자도 교사생활 중 66년8월 영장을 받곤 입대를 해보니 군대생활이 똑 가막소 같아 그 고생담을 여기 필하노니 남자라면 공감을 할게요. 長長夏日 “인간 재생창”이란 훈련소 생활은 그야말로 수라의場 같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배고픔,고된 훈련,화장실가는 일이였다. 탈영을 할까 봐 변소를 갈려면 꼭 3명이 손을 맞잡곤 담배 한 갑씩을 준비해 가야만 보초병이 용변을 허락했으니 말이다. 하루는 새벽5시에 “집합”명령에 팬티만 입곤 도열해서니 주번사관曰“어느놈이 막사옆에 오줌을 쌌지”하며 훈병장 나를 불러내어 몽둥이로 패는데 팬티가 피범벅이 되었다. 더더욱 힘든 것은 구보시 軍歌소리가 낮으면 다시 馬山고갯마루까지 갔다 오라하니 夏염천에 쓰러지는 병사가 많았다. 4주 훈련 끝에 英語통역시험이 있어 25명이 응시 8명이 합격을 하여 나는 7006이란 통역병과를 받아 의정부 101보충대로 왔었다. 하루는 인사과장이 불러서 가니“愼이병은 참 좋은 병과를 받았군” 미8군에 보내 줄테니“약”을 쓰란다. 하지만 마산서 용산역까지 기차로 오는 도중 인솔하사들께 돈을 다 빼았겨 땡전한 푼도 없다하니 그러면 일단 한국군에 가 있으면 美8군서 데리러 온단다. 정오께 20명이 군용트럭을 타곤 운천까지 가는데 車中 교도소 출신3명이 우리 신병들 옷을 무조건 벗기곤 자기들 헌옷을 입히는데 뒤 따라 오는 미군들이 우리 옷 벗는 꼴을 보곤 낄낄 웃는데 참 우리 엽전군대가 부끄러웠다. 부대에 도착하니 중대장님이 신병들 빽을 열어보면서 “요 새끼들 새 옷은 다팔아먹곤 헌옷만 사 입고 왔군”하며 패는데 참 총이 옆에 있었다면 쏘고 싶은 심정 이였다. 하루는 중대장님이 불러서 가니 “야,愼이병 Mos가 영어통역병이군” 잘됐어,愼이병은 앞으로 장교 숙소서 자곤 英語강의 좀 하라면서 나도 기쁜게 불침번 안서서 좋고 병장놈들 간섭 없어서도 좋고 헌데 하루는 金병장이 불러서 가니“ 이새끼 왜 불침번 안서”하며 주먹으로 볼을 치는데 그만 어금니 두 개가 딱 떨어져 나가고 입에선 선혈이 낭자했다. 졸병땐 이리가도 맞고 저리가도 맞고 하도 뿔이 나서 탄약고에 가 수류탄을 훔쳐 와선 까 던지고 싶은 심정이였다. 이놈 역시 탈영병 교도소 출신이요 전라도 해남 놈으로 아주 악질이였다. 67년도엔 월남전이 한창때라 중대장님이 통역관 대리시험을 쳐 달라 하여서 군대란 “명령과 복종”만이 졸병들의 임무라 시키는데로 따랐다. 시험날짜 당일에 장교복 및 대위 모자를 쓰곤 山中호걸도 벌벌 떤다는 서울 중앙정보부엘 갔었는데 많은 장교들이 와선 서로들 담소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혼자 담장 옆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오전 2시간 필기시험을 친후 오후엔 英語구술시험을 친다하여 나는 지레 겁을 먹곤 퇴실 주차장엘 나와 운천행 버스를 탔다. 헌데 운천서 내려 김일성별장“산정호수”쪽으로 걸어오는데 짚차가 오더니 헌병이 경례를 하곤 “허ㅈㅂ대위님”이신가요”하면서 무조건 짚차에 태워선 헌병대로 와서는 패는데 내가 실신을 했었다. 5시경 중대장님이 오더니 헌병들과 대화를 하곤 봉투를 받아든 헌병이 날 귀대케 했다. 헌데 종종 내가 헌병대에 불려가선 조서를 받는데 하루는 중대장님이 “愼이병 너 원주 화학교육대에 가 있어보라 하여서 원주로 가게 되었다. 헌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학교엘 오니 RCA화생방교실을 짓는데 병사들이 동원되어 콩크리트 타설을 하는 도중 내가 다쳐서 운천으로 귀대 조치를 받았다. 의무대서 군의관이 열을 재곤 채혈을 해 가더니 내가 TF에 걸렸다면서 날 즉시 청평 59군병원으로 후송을 시켜서 나는 폐질 환자실로 입실, 치료를 받는데 큰 병원이라선지 죽어나가는 병사들이 많았다. 한달쯤 있으니 병세는 더더욱 악화되어 X레이를 찍어본 군의관이 날 馬山육군병원으로 후송케 하였고 4개월 후 의병제대를 하게 되었다. 회고컨대 軍생활에서도 불운을 당했고 재대 후 교직사회서도 아주 못된 놈이 있어 얄궂이 실업고만 나온 주제에 초등학교서 고등학교로 매관매직하여선 교감 교장까지 해먹으면서 감히 내 앞에서 군림을 하며 내게 막대한 피해를 준 이자들을 꼭 응징할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