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說歷說] 사마천의 역사조작 (1)
작성일: 2014-07-31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은 2,100년 전, 한(漢)나라 무제(武帝)때의 사관(史官)이다. 사마천은 우리역사를 계획적이고도 주도면밀하게 왜곡, 날조하여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뿌리를 완전히 잘라버린 인물이다. 동북아 전역에 한의 군현을 설치한 무제는, 북방의 흉노(훈족)를 정벌하고, 한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으로 산동반도의 위만조선(번조선)을 멸망시키고,(기원전 194- 기원전 108)북부여 영토를 넘보았다가, 고두막한 장군에게 대패하여 그 야욕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된다.
-(북부여기下)를 보면,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인, 고두막한 (기원전 108 재위 60년)은 쳐들어 온 한 무제를 격퇴하고, 북부여 4 대 고우루 단군에 이어, 5대 단군의 위(位)에 오르니, 호가 동명(東明)이요, 동명성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
사마천은 한 무제의 야망이 고두막한에 막혀 수포로 돌아가 버리자, 그 원한으로 이십오사 (二十五史)를 쓰면서, 사기(史記)의 첫 머리에서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과, 동방배달국 14번째 임금 치우천황과의 전투를 “금살치우(擒殺蚩尤)”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로 왜곡 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태어나기 2,600년 이전의 역사를 쓰면서, 책의 첫 머리에 한족시조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는 동이의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써버린 것이다.
그러나『환단고기』를 보면, 염제신농씨의 나라, 임금 유망이 쇠퇴하자, 치우천황은 유망을 함락시켰는데, 이때 공손 헌원도 천자가 되려는 야망으로 천황과 10년 동안, 무려 73회 전투에서, 치우천황이 73회 모두 승리 끝에 헌원을 사로잡아 제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응소가 주석을 붙인「사기史記」에도 ‘(蚩尤古天子)치우는 옛 천자였다.’ 「사기」의 <정의正義>편에는 치우군대가 ‘금속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대뇌 (큰활)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 역사서에서 조차, 치우천황을 천자라 하였고, 치우천황의 위엄에 온 천하에서 감히 대적할 자 없음을 인용함에도 불구하고,
천자인 헌원에게, 치우천황이 도전한 것처럼, 또 황제가 치우를 사로잡아 죽인 것으로 사마천은 거꾸로 뒤 집어 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기(史記)처럼 황제에게 치우천황이 패배했다면, 중국인들이 중국시조 황제에게나 제사를 지낼 일이지, 패군지장이며, 동방의 임금을 무신(武神, 兵法의神)으로 추앙하여 제사를 올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후일 유방도 전쟁터로 출정하면서,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치우천황이 그때 전사 했다면, 배달국이 18대까지 존속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존속이 되었다 해도, 15대 치애트 환웅이 즉위한 연도와도 비슷해야 할 것이다.
치우천황은 세계최초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고, 금속무기를 만들었으며, 뛰어난 도술로 붉은 안개를 지어 싸웠기에 서장족들은 너무도 무서운 존재인 치우천황을 “붉은악마”라 별명을 지었고,
동(東)쪽의 큰활을 쏘는 민족(大⍆弓=夷)이란 뜻으로 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라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황제를 사로잡아 제후로 삼았으며, 동방민족은 물론이고, 서방의 한족까지도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금살치우”로 역사를 바꾸고, 대륙의 역사와 문명의 뿌리가 동이가 아니라, 황제로부터 시작되었고,
중국이 천자 국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 내고, 주변국을 야만족, 오랑캐로 매도했다. 사마천, 자신이 태어나기 2.600년 전의 옛 역사를 쓰면서, 이처럼 배달과 한족의 역사를 뒤집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