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일섭의 그때 그 사람
작성일: 2014-08-07
백일섭의 그때 그 사람
어느 날 TV화면에 ’72년 초 아역배우로 데뷔(debut)해 ‘고교얄개’로 일약 최고의 아역스타로 스크린(screen)을 누볐던 이승현군이 보였다. 상승 가도를 달리며 화려했던 시절 꿈같은 이야길 반추하면서 한 스타의 인생역정이랄까, 아역배우로 대성공과 성인배우로선 한 순간에 몰락해버려, 카나다 로 이민을 갔다간 졸지에 망해 쪽박을 차고 돌아온 후 가정파탄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어머닌 요양시설에서 자신은 서울 근교 작은 원룸에서 자취를 하면서 기거,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은 재기과정을 대선배 배우 백일섭이 리얼리티하게 그려가는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 잘나갔던 그 시절과 절망상태인 지금 희비쌍곡선(喜悲雙曲線)을 풀어가는’ 후배 이승현과의 대담프로가 내겐 한순간이나마 옛적 추억을 회상케 하는 퍽 인상적인 편성으로 다가왔다.
백일섭은 내가 대학 1학년 때 충무로 대한극장에 “벤허”를 보러가서 극장 옆 다방 옆자리 손님으로 첫 대면을 했는데, 나와 동년배로 그 또한 청춘스타로 막 뜨는 시기였기에 밤샘겹치기촬영을 해 피로가 겹쳐선지 코피를 흘리는 것을 보곤 쉬운 일은 없구나, 싶었다.
’70년대 그 시절은 박정희 혁명정부가 정권을 잡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전격 북한을 방문 남북협상을 추진하면서, 북한 제2부수상 박성철 일행을 초청 남북74공동성명을 논의 했던 당시론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땐 경무대가 청와대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번번한 새 건물 한 채가 없던 시기였다. 난 H건설사 재직 중 청와대에 급파되어 북측손님 맞을 신관 한 채를 돌관 작업 하여 뚜닥닥 지어야 할 임무를 띤 일원이었다.
지금은 헐리고 없지만 마산인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버티고 있던 경호실 지하층이 청와대 구내식당이었다. 아역스타 이승현군의 어머니도 미모를 겸비한 식당주인이자 여배우가 아니었던가,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아역스타 이승현군은 유치원 생, 박지만은 초등학생으로 청와대(文官), 경호실(武官)직원들이 식당을 들고 나면서 어린 승현이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한마디로 “날 으는 새도 떨어뜨린 다”는 서슬 퍼런 경호실 옥상에 올라가 뛰고 굴리는 천방지축(天方地軸)인 것 또한 나의 유년시절을 방불케 했다.
연이어 두 번짼 바보연기스타 영구 심형래가 하늘을 찌를 기세로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스타덤에 오른 후 영광과 치욕을 겪으면서 살아온 얘기 보따리를 무성영화 변사처럼 가감 없이 풀어 헤치며 하는 말 자체가 명 코미디였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몸 연기에서, 두뇌플레이로 머리를 쓰는 연기의 개척자가 영구 심형래 이다” 움직이는 은행이랄 정도로 돈을 벌어 영화감독도 되고 「영구아트란 영화사」도 설립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화 ‘주라기 공원’을 본뜬 ‘영구와 공룡’ 을 만들어 성공 상승 가도를 달라다가 ‘디 워’ 가 미국시장에서 참패하기 전, 난 그 영화를 보았는데 뭔가 아니다, 란 생각에 미치자, 아니나 다를까 하루아침에 폭삭 내려앉았단다. 파산이란 무서움에 대한 설명이 내겐 필요치 않다. 동병상련이랄까 뼈 속 깊이 알기에 누구보다 칠득이 영구를 이해하게 된다.
미국의 영화제작사로부터 in D WAR 2 제작을 제의받아 제작비 100억 원을 투자 미국명배우 아만다 부룩스 를 캐스팅해 재기에 돌입했다는 사연과 그 실물과 흡사한 것 같은 공룡을 만든 실력에 믿음이 갔나 보다.
백일섭 은 “세상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러므로 나는 멀리서 보려고 노력 한 다” 란 미국최고 웃음과 노래의 어릿광대, 현란한 탭댄스의 명연기자 채플린 그가 남긴名句를 인용하며, 영구 심형래의 영욕(榮辱)의 세월, 기구한 스토리를 술잔을 기우리며 정겹게 마무리 짖는 씬 또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