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說歷說] 사마천의 역사조작 (2)
작성일: 2014-08-07
중국의 첫 역사는 황제 헌원에서 시작된다. 사마천은「사기」의 첫 머리부터, 황제 헌원과, 배달국 14대 임금인 치우천황과의 탁록 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황제와 치우천황이 같은 연대라면, 중국의 역사는 배달국 14대 치우천황 때 비로소 시작 되었으니, 한국의 역사보다 훨씬 짧다는 사실을 사마천의「사기」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은 조선의 정식국호를 쓰지 않고, 조선의 제후국인 예, 맥, 발, 숙신, 우이, 래이, 견이, 서이, 고죽, 고이를 쓰고 있다.
당(요), 우(순), 하, 상, 주의 역사를 기록 할 때도 그랬었다.
그러던 그가「송미자세가 宋微子世家」에서는 느닷없이 정식국호인 조선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봉기자어조선 (封箕子於朝鮮)이다.
그러나 <송미자세가 宋微子世家>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자조선의 역사 또한 거짓말이다. 봉기자어조선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는 말 뒤에는 이불신야(而不臣也)“신하로 삼지 못했다.”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제후도 당연히 신하인데 왜 신하로 삼지 못했을까? 실제로 기자가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하북성 태항산 일대로 주나라가 관섭할 수 없는 고조선의 영토로서, 처음부터 주나라가 제후로 봉할 수도, 신하로 삼을 수가 없었던 곳이다.
그러면 왜 중국이 이처럼 집요하게 한민족사의 진실을 숨기고, 말살하고, 역사를 뒤엎으려는 의도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중국대륙을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중국의 한족(漢族), 동쪽은 한민족의 영역으로, 중국 황하문명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고대의 성자들은 모두가 동방족 출신이었다. 역 철학의 시조인 5,600년 전의 태호복희씨를 비롯하여, 농경과 의학의 시조이며, 시장교역을 처음 가르치신 5,300년 전의 염제 신농씨, 동북아시아 최초의 금속문화를 일으킨 4,700년 전의 치우천황 등 중국의 5천년 역사에서 자기네 한족출신의 왕이 왕조를 열어서 대륙을 통치한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한족의 시조(始祖)라는 황제 헌원도, 오제(五帝)로 손꼽히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도,
3왕조의 하나라 우, 상(은)나라 성탕, 주나라의 문왕, 무왕까지도 혈통은 100% 동방 족이다.
중국의 3황 5제부터, 하, 상, 주 3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통치했던 왕조들,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동이족의 문화는, 단순히 전수해준 차원을 넘어서서, 동방배달족이 중국에서 직접나라를 건설하여 창업한 한국의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O 3황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헌원,
O 5제, 소호, 전욱, 제곡, 요, 순,
O 중국 시조로 알려진 황제 헌원
O 춘추 전국시대를 통일한 시황제의 진나라,
O 오환선비족인 양견 (문제), 양광 (양제)의 수나라,
O 이연(고조)과 이세민(태종)의 당,
O 야율보기의 요나라,
O 여진족인 아구타가 세운 금나라,
O 몽골족 징기즈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
O 고려출신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O 누르하치(애신각라 愛新覺羅: 신라의 후손)의 청나라,
이와 같이 중국의 시작, 삼황오제로부터 마지막인 청나라의 누르하치에 이르기 까지 전부 한족왕조의 순수혈통은 거의 없다.
이러한 큰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중국으로써는 남의 역사를
차사(借史: 빌림), 역사 도적질하거나 도용, 또 왜곡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