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판사판Ⅱ
작성일: 2014-08-18
조선시대엔 불교를 억압하고 탄압했던 불교수난사가 있었다. 주지할 것은 우리민족문화를 크게 발전시킨 세종대왕이 불교의 각 종단을 선종과 교종 두 종파로 통폐합 시켰다는 점이다. 전국에 공인된 사찰이 36승원과 승려 수는 3770명으로 한정시켜 놓기도 했다. 더구나 세종께서는 도성 밖 승려들에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다. 이후 승려들은 안양 청계사 등 주변 사찰에서 승복을 벗고 일반의 옷을 갈아입고 한양출입을 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북한산의 모든 절을 헐어 부수곤 승려들을 내 쫓았으며, 성내의 비구니 사찰을 없앤 뒤 그들을 노비로 삼았다하고 그 뒤 관노비로 삼거나 혼인을 시켰다.
이판승(理判僧)은 수행에 전염하는 승려를 일컬음이고, 잡무를 멀리하고 공부와 수행만을 하여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사판승(事判僧)은 절의 사무를 맡아보며 주지 승아래서 비록무지해서 공부엔 힘스지 못했으나 절에 남아 유생들과 위정자들의 횡포를 견디면서 사찰의 황폐화를 방지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경우 우리가 보통 쓰는 말이 이판사판이 이렇게 생겨난 말이다.
승려의 한양도성 출입금지가 풀리게 된 것은 1895년 고종3년 일제의 조선침략이 시작되면서 일본 승려들의 힘이 세어졌기 때문이란다. 일제가 문화적 탄압의 일환으로, 일본식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대처승을 장려하여 스님들이 처자식을 거느리는 일이 생겨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속히 불교계의 일본식 색깔은 짙어갈 수밖에 없었다. 1941년에는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지어 불교의 총본산으로 삼고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으로 바꾸었다.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쓰던 시대도 있었으나 아무튼 불교나 유교는 우리고유의 토속종교가 아닌 國外에서 들어온 종교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역사의 첫 장을 넘기자면 이미 太陽을 崇拜하는 환국(환인)배달(환웅) 고조선(단군)의 삼성조 시대부터 한민족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내려온 고유 상제문화 상제신앙이 존재 했었다. 옛 선인들은 이 세계가 3층으로 생겨서 上層의 光明界에는 빛과 더운 기운인 태양이 최고 上主神은 하계정신의 재해를 물리쳐서 세계를 환하고 밝게 光明化 함이 그 목적이요, 국가는 그것을 실현 하는 조직적 세력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 거룩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름지기 청결과 근로, 복종의 덕을 쌓아 발휘함이 神敎 三神 三道정신신앙의 대강령이었다. 이 道는 본래 天理人生의 당연한 규범을 따라 다만 자손과 조상이 전하여 「밝의 뉘(光明世界)」가 신시桓國에서 전하는 「밝 안」「뉘」는 世界 -니 「밝의 뉘」신을 숭배하는 광명세계, 곧 신의 뜻대로 누리라는 世上을 의미 天道를 실현코자한 민족고유 신앙이 외래종교 문화의 시달림 속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작금 로마 카톨릭교황의 방한을 보며 외세 종교에 밀려 오금도 펼 수 없음을 개탄하노라.
-붓가는대로 임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