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說歷說] 제천금인 후예, 투후 김 일제는 김 씨의 시조(1)

작성일: 2014-08-25

몽골고원에서, 중앙아시아,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초원을 몽골계, 투르크계(흉노, 선비, 돌궐, 몽골)의 기마민족이면서 유목민족인 이들은 유목생활을 영위하는데, 중국인들은 이 북방의 유목민족을 융戎, 적狄, 호胡, 훈 등으로 부르면서 무지막지하고, 흉악한 오랑캐로 매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중국인들의 생각이지, 북방민족은 농사를 짓기 위해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족과 생활방식이 다를 뿐, 결코 야만인이 아니다. 그들의 기마술이나 야금술, 금속가공 등은
오히려 중국문명을 훨씬 압도 하였을 뿐 아니라, 흉노제국이 강성할 때는 몽골에서 유럽까지 광활한 지역을 장악하였고,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를 거쳐, 공포에 질린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것도 흉노의 일파인 훈족이었다.
흉노는 기원전 4 세기 즈음에 등장하는데, 한창 강성할 때가 한(漢) 나라 때인데, 잦은 침략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해버릴 지경에 이르렀고, 한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흉노로 시집을 보내, 나라를 보존하는데 급급했다. 흉노제국의 우두머리는 선우라고 하였는데, 하늘의 아들 곧 천자라 칭했으며,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일 년에 3 번의 큰 천제(天祭)를 지냈다.
삼신문화의 본 고향인 단군조선의 삼한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 진한을 대 단군이 다스리고, 마한과 번한을 부 단군들이 다스린 것처럼, 선우가 중앙을 통치하였고, 동쪽에는 좌현왕을 두고,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를 하였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는데, 좌현왕을 우현왕 보다 더 우대하였다. 흉노국의 좌현왕인 휴도왕은 본래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다. 소호 금천씨의 후예들은 금(金)으로 크게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하늘(天)에 제사 지내며, 지극히 모셨으므로, 제천금인(祭天金人)이라 불리었다. 흉노국(匈奴國)의 좌현왕인, 휴도왕과, 태자 김 일제(金日磾)는, 한 무제와의 농서전투에서 패한다.(기원전 120 년) 태자 김 일제는 어머니와 함께,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한 무제의 말먹이 꾼이 되어 충실히 일하자, 한 무제에게 인정을 받아서 시중(侍中)의 직책으로 봉사하고, 마침내 표기장군으로 승진 되었는데, 그 후 망하라(莽何羅)의 모반을 미리 탐지하여, 한 무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 공로로서“투후”(陀侯:오르도스 지역의 제후) 라는 벼슬에 봉해지는 동시에, 선조들의 제천금인의 정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김(金)씨 성을 한 무제로부터 하사 받았다.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이, 한 무제에게 하사 받은 투후국(陀侯國)이며, 기원전 86년, 약 3만 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김 씨의 왕국(金氏王國)을 건설 했다. 후손 중에서는 한나라 11세 원제(元帝)의 비(妃) 효원 왕후도 나왔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투후 김 일제” 제사를 지내며, 투후국의 성, 투성(陀城)이라고 부르지 않고, 김 일제의 김을 따서 금성(金城)이라 부르고 있다. 신라의 왕도(王都)인 경주가 금성이 아니던가!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에서 똑같은 지명을 쓰고 있음은 정말 우연한 일일까? 투후 김 일제가 묻힌 곳은 섬서성 시안에 있다.
김 일제 외에는 지금껏, 그 누구도 투후라는 관직을 받은 사람이 없으며, 황제 그 다음으로 높은 직위(제후)다.
한서(漢書)에 보면, 김 일제의 증손 김 당까지 이어지는데, 갑자기
김 일제 가문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된다.

-대한사랑 정연욱-